우리는 어떤 개가 다른 개를 처음 만나면 잠시 서로 이리저리 살펴보고 냄새를 맡아가며 상대방을 파악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서너 살쯤 되는 어린 아이들도 처음 만나면 유사한 방식으로 서로를 파악하는 것 같다. 어른들의 경우도 비슷한 방식으로 낯선 상대방을 파악하고 평가한다. 다만 어른들의 경우에는 상대방을 평가하는 데 감각과 지적 능력을 매우 복합적으로 사용하며, 그 목적과 동기가 복잡하다는 점이 다르다. 또한 어른들은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비해서 자신이 추구하는 어떤 목적에 부합하도록 오랜 기간 동안 힘들게 준비를 하며, 그 목적에 부합하게 외모를 꾸미고 태도나 언행을 가꾼다.
연중 이때쯤에 대학가는 평가로 모두들 바쁘다. 졸업을 앞둔 학생들은 취업을 위한 평가 절차 중 하나로 면접을 받아야 한다. 입학을 원하는 예비 대학생들도 자신의 학업성취를 평가받고 또 면접 고사를 치러야 한다. 재학생들은 학기말 시험으로 한 학기의 학업 성취도를 평가받고, 교수들도 수업평가 뿐만 아니라 연구업적 평가 등 여러 가지 평가의 대상이 된다. 괴롭지만 우리 모두는 거의 평생을 평가의 대상이 되거나 주체가 된다.
모든 대상에 대한, 특히 사람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것이다. 우리의 지각 자체가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은 도무지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처럼 부정확한 평가들 중에서도 가장 부정확한 것이 자기평가일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자신을 평가하는 데는 지극히 서툴다. 다른 사람들의 면면은 자세히 훑어볼 수 있지만, 자신의 얼굴과 머리를 포함하는 신체의 중요한 부분 및 자신의 언행을 결코 직접 볼 수 없다. 그만큼 자신을 스스로 객관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자주 거울을 들여다보고, 비춰지는 모든 사물에 나타난 자신의 모습을 시도 때도 없이 습관적으로 쳐다본다. 반면에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는 게으르며 서툴다. 마음속 상태는 직접 볼 수 없으니 비춰서 그 상을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처럼 비춰볼 수 있는 마음속 구리거울이 반성적 사유이다. 그것은 닦아야만 상이 생긴다. 그러나 그 상 역시 계속해서 흔들리고 변하고 있어서 여전히 매우 불확실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외모를 꾸미고 언행을 가꾼다. 그러나 그것이 자칫 정도를 벗어나면 조소의 대상이 되고 만다. 내가 항상 껄끄럽게 생각하는 영어 단어가 ‘condescension’과 ‘snob’ 그리고 ‘pedantry’이다. 첫 번째 단어는 “우월감을 의식하면서 짐짓 친절(겸손)한 척 하는 것”을 뜻하고, 다음 단어는 “지위나 재산만을 존중하여 윗사람에게 아첨하고 아랫사람에게 교만한 속물근성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며, 세 번째 낱말은 “학자연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세 단어 모두 실제 자신이 가진 능력보다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그것을 ‘은근히’ 다른 사람에게 뻐기는 태도를 표현한다. 즉 그렇지 않은 척 짐짓 위선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자기 자랑을 하는 꼴불견의 경우이다. 외모에 자신의 내적 능력과 인품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외모가 내면보다 과도하게 표현된 경우이기도 하다.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와 과소평가는 모두 문제가 있지만, 나는 과대평가의 경우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학생들의 경우 자신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하여 위축되고 도전의욕을 잃는 것보다, 부정확하지만 다소 부풀려진 기대를 갖고 도전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환상을 가져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미 자신이 성취한 것이나 자신이 처한 현재 위치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정확하게 평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자신이 이룩할 가능성과 잠재력에 대한 과대평가는 긍정적 효과가 있을 수 있겠지만, 자신의 현재 능력과 성취에 대해 과대평가를 하고 있으면 과대망상이 되며,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어처구니없고 안타까운 블랙코미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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