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어떤 사건들과의 마주침으로 이루어져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판단하고 움직여야 한다. 아무도 지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수는 없다.
삶은 우리에게 언제나 지금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갈 것을 요구한다. 그 요구는 사건들로 제시되며, 우리는 거기에 응답하며 삶을 구성해가야만 한다. 그 요구 앞에 섰을 때, 사람마다
또는 사건마다 판단의 척도는 다를 수 있겠지만 대체로 가장 안전한 방법은 ‘적당함’, 불편한 방법은 ‘정당함’일 것이다. 안전한 방법이라고 해서 쉬운 것은 아니고, 불편한 방법이라고 해서 어려운 것도 아니다.
특히 어떤 부당함, 불의, 이해불가의 사건들과 마주할 때 저 두 가지 방법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의 거의 전부인 듯 보인다. 우리가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동안, 선택에서 비껴나 있는 사람들은 적당히 하라고 말한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더한 수모도 굴욕도 견디며 살아온 것이 이 땅의 역사이며 그렇게 세상은 유지된다고 말한다. 우리끼리 이야기하고 털어버리자고 말한다. 그때 우리는 원인에 대해서는 손쓰지 못한 채, 그것의 결과인 우리 마음의 분노만을 해소하고 다시 집으로 직장으로 돌아간다.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그곳은 그 자리가 아님을 뒤늦게 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정당하게 맞서라고 말한다. 아니 그 사람은 ‘내면의 나’이고, 이미 그런 선택으로 살아버린 사람들, 그 사람들의 삶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움직여버렸던 내가 하는 말이다. 그 앞에서 동요한다. 어디까지가 나의 권리이고, 나는 지금 무엇을 주장할 수 있는가, 그 주장은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인가 묻고 또 묻는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나에게 무엇인가를 걸 것을 요구한다. 이제 이후에 어디에 서 있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불안에 내맡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누군가는 그 불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일까. 하물며 저 두 선택 외에 제3의 선택, 외면이라는 방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으로 들어가는 이들은 누구일까. 쌍용차 집단 해고라는 사건에서 비해고 대상자, 즉 ‘산 자’로 불렸던 이들 중에 72명이 ‘죽은 자’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옥쇄파업 현장을 지켰다. 사람들은 ‘니가 왜 거기에 있느냐’고 물었다. 아마 그들은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수천 번도 더 물었을 것이다. ‘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이제 내 삶은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그러나 어떻게 해도 마음의 무거움을, 분노를 해소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니 그것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곳에 있어야 했을 것이다.
마르코스는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에서 가만히 있을 때는 긴 길이 어디를 향하게 되는지 알지 못하지만 걷다보면 그 길이 향하는 곳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멈춰 있으려 하는 사람은 멈춰 있을 수 없지만, 걷는 자는 자기가 걷는 길을 알게 될 것이다. 걷는 자의 불안과 고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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