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직 교수와 학생 간 대화의 장을 열며 소통의 물꼬를 튼 김윤수 총장의 시도. “일어~나!”라는 함성과 함께 23일부터 25일까지 열린 2009 용봉대동풀이. 이 자리들로 인해 우리 대학 안에는 소통의 물결이 흐르고 구성원 간에는 화합이 이루어졌다.
소통은 내 뜻을 상대에게 잘 전달하는 것과 상대의 의사를 잘 파악하고 받아들이는 것인데 둘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원활한 소통은 이루어지기 힘들다. 즉, 훌륭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만큼 타인의 의견을 경청할 줄 알아야하고, 자신이 상대를 설득하고자하는 만큼 상대의 진지한 대안 제시에 자신도 설득당할 수 있다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어야만 한다. 자신의 주장만 펼치고 상대의 의견을 묵살한다면 상대 역시 자신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는 역지사지 등이 소통에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덕목을 바탕으로 우리 대학 구성원 각자는 보여주는 현수막이 아닌, 움직이는 현수막이 될 필요성이 있다. 어느 한 정보를 얻은 자가 다른 이들에게도 알릴 수 있는 능동적인 현수막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면 구성원 간 소통은 더 원활해 질 것이다. 그러나 나만 알고 남이 모르는 것이 확대 될 때 서로간의 유대는 점차 상실되고 상호 신뢰가 떨어져 폐쇄적인 인간형을 지닌 자들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 중력의 법칙을 소통에 적용시켜봄은 어떨까? 막혀있는 소통을 해결하기 위해 위에서 먼저 아래로의 소통을 시도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마땅히 전달할 것이 있다면 위아래를 불문하고 먼저 소통의 물꼬를 트는 것이 옳다. 오히려 잘 알고 있는 자들이 모르는 자들에게 전달할 의무가 있다고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얘기일 듯하다.
아래에서도 귀가 닫혀 있다면 그도 문제다. 위에서 아무리 소통을 시도한다고 해도 들을 귀가 닫혀있는 상태라면 소통은 불가하다. 귀를 닫아두지 않고 항상 열어두는 경청의 자세가 필요하다. 자신이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으려는 행동보다 자신을 올바르게 각성시키는 말이 들린다면 겸허히 수용할 수 있는 마음도 필요하다. 이 모두를 갖춘 자들이 늘어나야 사회의 소통 또한 가능케 된다.
우리 대학의 머리, 김윤수 총장이 축제 기간을 앞두고 시도한 구성원 간 소통은 아주 좋은 시도였다. 앞으로 관료주의적 조직을 좀 더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문화로 바꿔나가 우리 대학의 의사소통이 훨씬 부드러워지고 원활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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