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회에 다니는 젊은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일종의 선입견 탓인데, 내가 만나보았던 교회 또는 선교회의 청년들은 사회변혁에 관심을 가지지도 가난한 삶을 지향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이들은 선하고 부드러운 심성을 지녔고, 이 세계의 가난과 부조리함에 대해서 신께 기도했지만, 대학에서 데모하는 학생들을 곱게 보는 이들도 진보정당에 관심을 가진 이들도 없었다. 앞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이들은 있어도 자신이 가난하게 살겠다고 하는 이들은 없었다. 아니, 나는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이들이 나와는 다른 예수를 마음에 품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대학 신문에 웬 예수? 전도하려고? 그건 물론 아니다. 느닷없이 종교인들을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다. 올해에 출간된 책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꼽고 싶은 책이 있어 소개하려는 것 뿐. 그것은 김규항의 ‘예수전’이라는 책이다. 김규항에 관해 아는 사람들은 이 책이 일반적인 종교서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테다. 사회의 진보와 사람들의 변화에 관심이 많은 그는 자신의 삶과 사유를 지탱하고 추동해가는 한 축으로 교회의 예수가 아닌 성서에 나타난 예수를 공부한다. 저자는 예수를 신의 아들보다는 역사적인 인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고 축복을 내려주는 이가 아니라, 우리가 따라 배워야 할 한 인간의 표본으로 바라본다. 그렇기에 이 책은 ‘마르코 복음서’를 강독하는 형식을 취해 인간 예수의 삶과 정신을 따라가며 그 함의를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앞에서 사회변혁과 가난에 대한 태도를 문제 삼은 까닭은, 이 책에서 김규항이 바라보는 예수가 그 두 가지를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책은 혁명가로서의 예수를 부각시키지는 않지만, 예수가 당시 ‘지배계급과 로마의 이중적 착취에 시달리’던 갈릴래아 사람이며, 때문에 ‘소요와 봉기가’ 끊이지 않던 저항의 환경에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예수는 단지 현실에서의 삶이 어떠하든지 천국에서의 안락한 삶이 있으니 이 고통과 부조리를 참고 견디라고 하는 사람이 아니며, 그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지금 이곳에서의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 것임을 말한다. 또한 저자는 예수가 이 세상에서의 풍요를 약속하는 이가 아니라 가난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임을 분명히 한다. 예수가 권하는 가난은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의 궁핍함이 아니며, 도리어 인간적인 삶을 왜곡시키는 ‘필요를 넘어선 부’를 향한 경계를 의미한다. 그 욕심 또는 욕망이 자신의 자유를 해치고, 그것을 넘어 내 이웃이 혹은 얼굴을 알지 못하는 이가 누려야 할 재화를 빼앗고 있는 것임을 상기시키려 한다. 저자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성경구절은 그저 비유가 아니며, 절대로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선언’이라고 말한다.
뭔가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권을, 어떤 정책들을 비판하고 보다 나은 체제를 모색하면서 동시에 늘 이 물음을 자신에게 향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는 충분히 가난한가, 가난한 내 이웃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가난한가.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