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만에 들어간 대학, 전남대에서 그는 수백 명의 신입생들 앞에서 신입생 환영회 때 사회를 봤다. 모두가 그의 유쾌한 말솜씨에 반했고, 우렁찬 에너지에 박수를 보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마에 늘 핏대를 세우면서도, 양보할 줄 알며, 타협할 줄 알면서도 자신의 뜻을 꺾지 않는 그. 박정희 정권 때 긴급조치 19호로 감옥에 들어가 옥살이도 해보았고, 518광주민중항쟁 때는 현상금 지명수배 당해 수배자로도 살아봤다. 늘 ‘국가와 민족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며, 시민단체에서 오랫동안 부정부패를 경멸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사회 운동을 해왔던 그. 그래서 그가 제 16대 새천년민주당 당원으로, 국회의원이 된 것은 아주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치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날들을 보냈다”고 지금도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그. 현재는 김천과학대학 총장으로 있으면서 새파란 학생들의 푸른 미래를 그리고 있다. 그는 파란만장하고 격렬하며 뜨거운 삶을 살아왔다.


그는 김경천이다.


그리고 그는 ‘여자’, ‘여성 리더’다.

▲ 김경천 총장

삶 자체만으로 ‘여성 운동가’

눈치 챘을지 모르겠지만 누구나 ‘글의 주인공이 남자구나’라고 예상하리라고 생각하고 글의 첫 부분을 썼다. 아직도 성에 관한 고정관념이 박혀있는 한국사회에서는 사실 그의 지금까지의 여정을 짤막하게 쓴 글을 보고 ‘여자’일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 고정에 대한 편견을 깨뜨렸다는 것, 그의 삶 자체만으로도 ‘여성주의자’이며, ‘여성 운동가’이다.


기자도 남성과 여성의 역할 고정에 관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던 탓인지, 맨 처음 ‘제 16대 국회의원’이라는 그의 타이틀과 ‘김경천’이라는 그의 이름을 보았을 때 그가 당연히 남자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한 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그의 삶을 훑어보았을 때 당연히 그는 ‘남성적일 것이다’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기자가 만난 그는 어떤 다른 여성보다도 여성스러웠으며 소녀의 감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소녀처럼 곱기도 하고, 말투는 소녀처럼 공손했다. 어린 시절 합창단을 했을 법한 목소리였다. 인터뷰는 그가 이사로 있는 YWCA에서 진행됐다.

▲ YWCA에서 기자와 김경천 총장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들보다 6년 늦게 간 대학, 야학과 함께

  고등학교 졸업 후 1962년에 바로 YWCA 사무직으로 가서 활발하게 활동 하다가, 남들 보다 조금 늦은 1966년에 전남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신학을 전공하고 싶었는데 전남대에는 신학 전공이 없어, 신학과 관련이 있는 철학과에 입학 했다”고 말했다. 남들보다 6년 늦게 입학했기 때문에, 6년이나 어린 동생들과 동기로서 학교를 다니게 됐었다. 그는 “공부도 아주 열심히 해서 학점도 좋았고, 신문사 활동을 하며 글도 썼고, 최초로 전남대에 방송국의 설립 기초가 된 방송실도 만들며 아주 활발한 활동을 했다”고 그 때를 회상했다. 여러 가지 활동도 하며,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YWCA 일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또 밤에는 야간 중학교에서 ‘야학반 교사’로도 활동했다. 어느 하나 놓치지 않았던 그는 대학시절을 아주 따뜻하게, 그리고 뜨겁게 보냈다.

▲ YWCA 사무실에서 집무를 보는 김경천 이사 김천과학대학 소식지가 앞에 놓여있다.

“YWCA는 내 인생의 자양분”

  YWCA(이하 Y) 활동을 한 지 올해로 47년째다. 그의 나이가 올해로 69세니까 인생의 절반 이상을 Y와 함께 보낸 것이다. 젊은 시절 Y 사무직원으로 시작해, 간사로 활동하다가, 호남지역 간사로, 사무총장으로, 현재는 이사로 있다. 기자와 인터뷰를 한 날도 Y에서 주관하는 행사가 열리던 날이었다. 김경천 총장은 “Y는 내 인생의 굉장한 자양분”이라고 말했다. 또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웅변을 했는데 그 때부터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이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는 내용으로 웅변을 하곤 했다”고 하면서 “그러한 소중한 가치들을 이룰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고, 이룬 곳이 Y다”고 설명했다.

  Y에 들어오기 전에도 그랬지만, Y에 들어오고 난 후에 직접적인 사회 문제들과 부딪치고 해결할 수 있는 방안들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특히 “70년대에 내가 소비자운동을 가장 먼저 시작했다”고 이야기하면서 “소비자운동은 인권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 해 소비자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는 Y에 있으면서 소비자운동 뿐만 아니라, 환경에도 관심이 많아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공동의장으로도 있었으며, 1994년에는 광주/전남 환경운동 핵반대 공동의장으로도 있었다. 또한 정치에 입문하게 된 때부터는 한국여성정치연맹 광주광역시 연맹 고문, 광주광역시 여성발전위원회 위원, 광주/전남 민주여성단체연합회 자문위원 등으로도 활동하면서 ‘여성’의 중심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정치인 생활, ‘여성 정치인’ 생활은 어땠을까?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 가졌으면”

  부정, 부패, 썩은 정치, 정치‘판’, 폭력 정치. 우리가 정치에 대해 이야기 할 때 흔히 떠올리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정치에서 멀어져 깨끗하고 정직한 정치를 하고 싶었다”고 이야기 한다. 그 때 그가 광주 동구의 지역구 의원에 출마하면서 내걸었던 정치 기조도 ‘산소 같은 정치’였다고 한다. 국회 16대 국회의원으로 있으면서 그는 “비상식적인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니까 정말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또 “정당정치이기 때문에 당에서 결정한 것을 따라가는 것이 굉장히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고 그 때를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국민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소외 계층을 돕는 입법을 하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며 “검은 돈 받지 않고, 우리 국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 했다”고 말했다. 최선을 다 한 그의 노력은 ‘NGO가 뽑은 우수 의원’에 뽑히고, ‘국회의원 278명 중 18위’라는 평가를 받는 등 국민들의 평가로 확인 됐다.


  한편 그는 ‘대한민국 정치’에 관해 “국민들이 정치에 많이 참여를 했으면 좋겠다”며 “정치는 산소와도 같은 것이니, ‘정치’와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말고 산소와 같이 ‘나’와 함께 하는 것, 없으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정치에 참여하자”고 당부했다. 특히 ‘여성 정치인’으로 국회에 있었던 그는 “정치는 남성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여성들이 살림을 더 잘하듯 정치도 여성들이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렇게 믿는다”고 이야기했다.

▲ 김경천 총장

새파란 학생들의 푸른 미래를 걱정하다

  그는 “국회에 또 가게 될 지는 아직 모르겠다”며 “현재 있는 김천과학대학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 해 학생들의 미래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작년에 김천과학대학 총장으로 취임했다. 김천과학대학은 경북 김천에 있는 3년제 전문대학으로, 실용학과가 많이 있는 정원 1천4백20명의 소규모 대학이다. 그는 “중소도시에 위치해 있고, 열악한 여건 때문에 학생들의 꿈을 펼치기에는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다”면서 “이 대학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몰랐던 전문대학의 어려움들이나 전문대학이 4년제 대학에 비해 많이 차별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얼마 전에 중국의 한 대학과 1대 1 자매결연을 해, 우리 대학 학생이 그 곳에 가서 수업을 들을 수도 있고, 그 곳 학생들이 우리 대학에 와서 수업을 들을 수도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놓았다”고 밝혔다. 그는 학생들에게 언제나 “자신감을 갖고 꿈을 펼치라! 세계 속에 경쟁하는 대학을 만들겠다”고 이야기 한다고 한다. 그의 아름다운 꿈이 학생들의 꿈처럼 빛나고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라본다.


이 땅의 여성과 전남대 학생들에게

  남자들은 조금 서운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그는 이 땅의 여성과 전남대 학생들에게 해줄 말이 많다.

그는 “남녀평등한 사회가 됐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직 멀었다”며 “여성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국가에서 양육 시스템을 제도적으로 마련하고 관련 지원을 대폭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아직은 힘겹다”며 “여성들이 꿈을 갖고, 자유를 찾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김경천 총장은 “최근에 가장 신나는 일은 조금 지난 일이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미국 대통령 당선’이다”며 “흑인들은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의 주인이 되기 전에는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꿈’ 조차 꾸지 못했는데, 이제 그의 꿈을 이룸으로써 흑인들도 백인들과 동등하게 ‘꿈을 꿀 권리’를 갖게 되지 않았냐”고 이야기했다. “어떤 꿈을 꾸느냐에 따라 사회가 바뀐다”는 것이다. 또한 나아가 “남성과 여성이 같은 꿈을 꾸고, 꿈을 이룰 동등한 기회를 갖게 되었으면 한다”는 것.

▲ YWCA 사무실에서 집무를 보는 김경천 이사

  마지막으로 그는 전남대 학생들에게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실’, ‘근면’, ‘정직’이라는 세 가지 가치가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지키기 어려운 가치, 그러나 꼭 지켜야 할 것으로 내세우고 싶다”고 전했다. “어느 곳을 가서든지 떳떳하게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할 일을 미루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가 지금껏 ‘여성 리더’로서 중심을 잃지 않고, 포기 하지 않고 늘 한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이 세 가지 가치를 언제나 지키려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곧 ‘종심(從心)’, 공자가 ‘나이 70에 이르면 마음먹은 대로 행동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데에서 유래한 종심, 70세에 이른다. 하지만 그의 꿈은 아직도 훨훨 날고 있다. 오바마의 당선에 신나할 줄 아는 소녀 같고, 뜨거운 가슴을 지닌 김경천 총장의 꿈. 그의 꿈을 보며 우리도 시들지 않을 꿈을 그려보면 어떨까?

경력
前 제 16대 국회의원(광주동구)
국회 교육위원회/여성위원회/예산결산 특별위원회 위원
광주YWCA 사무총장
광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
동신대학교 객원 교수
現 광주YWCA 이사(교육위원회 위원장)
(사)민주화 추진협의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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