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를 어떻게 말해야 아니 말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고, 모두들 저마다의 ‘무엇’을 품고 거리로 나왔다. 봉화마을로, 광장으로, 무엇보다 자신들의 견고한 일상 바깥으로. 어떤 이는 끝없이 줄지어 서있는 추모객들에게는 모두 어떤 할 말이 있는 것 같다고, 마이크만 들이대면 무엇인가를 쏟아낼 것 같아 보인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품고 나온 것을 몇 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그 속에는 그를 대통령으로 밀어 올리면서 품었던 자신들의 어떤 열망이나 희망이 스러졌다는 생각과, 이명박 정권 아래 계속되고 있는 죽음의 행렬에 대한 분노가 녹아들어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거리에서, 삼삼오오 모인 어떤 장소에서, 집으로 돌아와 다시 인터넷 공간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청와대의 차벽은 그 기억의 방식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다. 이 애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거대한 분노의 물결이 다가올지 모른다는 예감, 그것은 비단 청와대만의 불길한 예감은 아닐 것이다. 벌써 몇 번씩이나 바깥에서 모여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며 슬픔에 감춰진 어떤 열기를 알아채고 있다. 사람들은 전에도 그 슬픔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다른 힘으로 만들었던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 이후가 문제이다. 청와대에도 우리들 자신에게도. 우리는 이명박을 욕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 아니,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헌화의 몸짓으로, 이 죽음을 기억하겠다는 말로, 같이 모인 이들을 바라봄으로 지금 다시 확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아무도 사람들이 지금 저마다 품고 있는 ‘무엇’이 어떻게 표출될지, 기억하겠다는 말이 어떻게 실현될지 알지 못한다. 다만 약한 자들의 무기는 오직 ‘기억’ 뿐이며, 그 기억의 내용과 방식이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 그러므로 슬픔이 가라앉은 자리에 단단히 박아 넣을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그때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우리는 지금 그의 민주주의를 추억하고 있지만 우리는 결코 그 민주주의만으로는 행복하지 않았었다는 사실이다. 그 민주주의 속에서도 노동자가, 농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등록금은 계속해서 올랐고, 비정규직 노동자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가 죽기 정확히 20일 전 ‘박종태’라는 특수고용직 노동자가 우리에게 어떤 연대를 호소하며 죽어갔듯이, 그때도 마찬가지 일들이 벌어졌었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음을 기억할 때는 그의 한계까지도 기억하며, 이후에는 어떻게 그를 넘어 더 앞으로 나갈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의 한계와 그를 밀어 올렸던 우리 자신의 한계가 무엇이었는지를 아프게 기억해야 한다. 그 기억이 새로운 힘을 만들 때까지, 역사의 새 장을 써나갈 수 있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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