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의 핵심은 ‘좋은 책’이다. 고전과 경전은 때와 곳을 초월하여 항상 통하는 인류정신의 보편성을 담은 훌륭한 책이다. 서글프게도 고전의 가치와 고귀성은 읽히는 정도에 반비례한단다. 위대한 성현이 혼신의 정성으로 남긴 불후의 명작이 젊은이 영혼의 혀에 감칠맛을 곧장 퍼부어 주긴 어렵다. 마음의 눈이 열린 만큼 보이므로, 인생과 자연사회에 진지한 고민을 품고 혜안을 뜨기 전엔, 아무리 좋은 글도 마이동풍·우이독경이며, 설사 보더라도 주마간산이기 쉽다.

고전과 경전은 무미건조한 현미밥과 같고, 무색투명한 햇빛과 비슷하다. 현미밥은 거칠고 딱딱해 꼭꼭 씹어야 하고 맛도 없어, 감칠맛에 익숙한 건강한 문명인들은 잘 먹지 않는다. 당뇨나 고혈압 같은 문명병에 걸린 환자나 죽지 않고 살려고 식이요법으로 마지못해 먹는다. 허나 현미밥을 오래 꼭꼭 씹으면 구수한 단맛이 배어나고, 섬유질과 온갖 무기물이 풍부해 건강식으론 그만이다. 고전과 경전도 마찬가지다. 잘 곱씹어 음미하면 정신생명의 온갖 자양분이 흠뻑 담긴 최고의 건강식이다. 또 햇빛은 무색투명하여 단조롭고 따분하여 별 멋이 없어 보이지만, 프리즘이나 비 갠 뒤 공중의 물방울(천연 프리즘)을 만나면 오색 칠색, 아니 무한색의 찬란한 ‘자연 무지개’가 나타난다.

고전과 경전도 마찬가지다. 우리 영혼의 천연 프리즘만 깨끗이 잘 닦아대면, 경전에 숨은 정신광명(靈光)이 분광(分光)하여 자연 무지개보다 훨씬 폭넓고 휘황찬란한 ‘정신 무지개’를 우리 영혼에 눈부시게 드리운다. ‘자연 무지개’에선 적외선과 자외선이 우리 눈에 안 보이지만, ‘정신 무지개’는 적외선과 자외선까지 모든 빛을 온전히 느낀다. 책을 읽고 강렬한 영적 전율과 황홀경을 맛보는 건 이 덕분이다. 공자님이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은가’말씀하시고, 성경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하신 법열(法悅)이다. 현미밥을 씹지도 않고 단맛과 영양분을 얻고, 프리즘도 없이 육안으로 햇빛을 쳐다보며 무지개만 보고자 하는 자는,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바보다.

경전읽기는 내 마음의 주파수를 성현의 마음에 동조(同調)하는 일이다.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우주의 절대진리를 송출하는 지혜자비평화의 복음과 법음(法音)을 받기 위해서, 우린 성현의 말씀을 읽고 노래하며, 그 마음과 하나가 되어 간다. 그게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수행이다. 고전 읽기와 경전독송은 자성을 지닌 금속을 자기화하는 물리와 비슷한 영리(靈理)다. 보통 교양독서가 바늘에다 자석을 갖다 문질러 자기화하는 거라면, 고전읽기는 얇은 에나멜철선을 여러 번 감아 코일을 만들고 선에 전류를 흘려 전자석을 이루는 것과 비슷하다. 한번 독송할 때마다 코일을 한번씩 더 감는 것과 같다.

고전 읽기는 성현의 전원(電源)에 자기 심념(心念)의 코일을 갖다 꽂는 수행이다. 낭송하든 묵독하든, 되풀이하면 내 심식(心識)의 파동이 진동하는 만큼 심령의 코일이 그에 비례해 칭칭 감기면서, 동시에 성현의 영광(靈光)전자기가 이심전심(텔레파시)으로 전해져, 심념의 코일이 전자석이 되고 영전(靈電)의 감동을 느끼게 된다. 내 안의 불성과 영성을 불러 일깨워 성현을 닮아 가는 경전독송은 가장 쉬운 수행법문이다. 무미건조한 고전과 경전을 꾸준히 읽고 독송하는 원리가 바로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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