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고전을 좋아한 인연으로, “공자처럼 공부하고 노자처럼 노닐며 묵자처럼 묵고 장자처럼 잠자자!”는 영감이 문득 떠올랐다. 요순우탕같은 성왕들은, 한낱 필부에 지나지 않는 내가 감히 본받겠다고 말할 수 없는 ‘천자’들이시고, 또 요즘같은 말세에 어찌 꿈이나 꾸겠는가? 하여 나는 춘추전국 혼란 속에 인류 정신생명의 횃불을 훤히 밝힌 성현들을 삶의 목표로 삼아, 부처님처럼 올바른 깨달음에 이르고 해탈의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
  공자는 논어 첫머리부터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기쁨을 일깨운다. 논어에 ‘學’이 66번 나올 만큼, 공자는 옛것을 부지런히 배우는 ‘好學’을 강조한다. “열 집 모인 마을엔 반드시 자기만큼 忠信스런 사람이 있지만, 자기만큼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고 자부할 정도다. 물론 가르침에 지칠 줄 모르는 열정도 컸다.
  노자도 엄청 열심히 공부했다. 근데 공자와 달리 현세에 초연하게 무위자연(無爲自然)에 노니는 기풍이 혼란한 시대 선비의 본보기가 되었다. 노는 건 좋고 필요한데, 참말 잘 놀아야 한다. 우주적인 인생관을 지니고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아우르며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음이 없는(無爲而無不爲)’ 도덕의 경지에 노닐어야 참사람(眞人)이요 길손(道人)이다. 장자가 말하는 소요유(逍遙遊)가 그런 참사람의 노닒이란다. 시선 이태백은 “하늘땅은 만물이 쉬어가는 여관이요, 빛그늘(세월)은 영원의 나그네다.”고 읊었다.
  묵자는 근검절약의 본보기요, 경건하게 고행하는 수도자의 모범이다. 부모님 3년상도 생산을 던다고 간소한 장례(節葬)를 주장하고, 신세타령하며 일과 배움에 힘쓰지 않고 빈둥거리는 숙명론을 비판했으며(非命), 스스로 생산증진에 힘쓰지 않고 남의 나라 땅과 인민과 재화를 빼앗는 침략전쟁을 몹시도 미워하고(非攻), 예절과 음악과 춤은 사치로 여겨 물리쳤다(非樂). 오로지 하늘의 뜻을 따르고(天志), 어진이를 높이 받들며(尙賢), 씀씀이를 아껴 알뜰히 살림하고(節用),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아울러 사랑하는(兼愛) 이상사회를 꿈꾸며 실천했다. 아껴 쓰면 경상경비의 절반은 줄일 수 있다고 절검(節儉)을 앞세웠다. 그렇게 묵고 산다면, 세상에 무슨 거품과 무너짐과 싸움과 난리가 있으랴?
  장자는 노자보다 훨씬 현실을 벗어나, ‘어디에도 없는 마을(无何有之鄕: Utopia)’을 그리며 절대정신세계에 소요유한 이상주의자다. 그런 장자가 꿈꾼 참사람은 꿈이 없단다(眞人無夢). 늘 고요한 명상에 노니는지라, 낮에는 잡념망상의 번뇌(백일몽)가 없고, 밤잠자리에도 어수선한 꿈이 없다. 사람의 삶이 본디 한바탕 꿈이거늘, 그 꿈속에서 또다시 아웅다웅 꿈자리 사나운 삶은 얼마나 초라하고 서글픈가? 근데 장자도 꿈을 꿨다. 꿈속에 호랑나비가 되었는데, 깨어보니 자신인 거라. 그래, 호랑나비가 장자가 된 건지, 장자가 호랑나비가 된 건지, 알 수 없다고 물아일체(齊物)를 말한다. 유가와 법가에선, 법과 형벌이란 법과 형벌이 필요없는 이상사회를 기약하는 도구라 한다. 장자의 호접몽도 번뇌망상의 꿈이 없는 삶과, 삶 자체의 큰 꿈까지 깨어, 참으로 큰 깨달음의 절대자유에 들기 위한 선방편의 꿈이리라.
  배움(學)은 삶의 꿈을 깨어(醒) 깨닫는(覺) 수양의 과정이요, 무위자연에 이르는 유위의 공부다. 유위의 꿈과 배움 없인 무위자연의 깨달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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