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이스퀼로스 등 위대한 비극작가들을 낳은 아테네가 동시에 위대한 철학의 발상지였다는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세계와 인간의 속내를 파고드는 정신은 결국 슬픔과 고통에 대한 성찰을 과제로 떠안게 되는데, 그러한 성찰을 개념으로 객관화한 것이 철학이라면 드라마로 그려낸 것이 비극이다.
  어느 때나 진지한 작가들은 자기 시대의 아픔을 감지하고 그것을 이야기로 형상화한다. 하물며 역사 자체가 거대한 비극이었던 한국의 작가들이야 어떻겠는가. 요즘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연극을 보고 있는데 현대사의 아픔을 다루는 창작극도 몇 편 보게 됐다. 그런데, 나는 이 극들을 보면서 역사적 비극을 이야기하는 방식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됐다.
  이를테면 며칠 전 평화연극제에서 본 <그때 그놈>. 시골 경찰관인 마공창은 한편에서는 동네 다방 아가씨 초희를 사랑하는 사람좋은 노총각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안기부의 하청을 받아 일하는 고문기술자다. 마공창의 두 얼굴을 번갈아 보여주던 극은 마침내 비극적 결말을 내놓는데, 그의 고문에 목숨을 잃은 대학생이 실은 초희의 동생이었던 것이다. 이근안, 박종철 등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역사적 사건들은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이 알고 보니 적의 가족’이라는 진부한 비극적 아이러니를 위한 소재로 활용된다.
  지난 봄에 광주연극제에서 본 <짬뽕>. 80년 5월 광주의 어느 중국집 식구들이 5·18을 겪는 과정을 그린 극이다. 짬뽕을 배달하던 만식이는 배가 고프니 철가방 내려놓고 가라는 군인들을 뿌리치고 달아난다. 곧 시내 곳곳에서 학살이 벌어지자 만식이는 자기 때문이라며 자수하겠다고 나서고… 소동 끝에 결국 몇 명이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는 결말이다. 이 극의 비극적 요소란 결국 ‘어려운 처지에서도 밝은 내일을 바라보며 화목하게 지내던 가족들이 5·18을 겪게 되어 불행한 결말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5·18의 자리에 ‘살인강도’가 들어가든 ‘외계인 침공’이 들어가든 ‘전염병’이 들어가든 이야기에는 별 지장이 없을 것이니 여기서도 5·18은 배경에 불과하다.
  작가들은 비극적 역사를 다루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역사적 비극이 아니다. 이야기는 역사를 말하는 듯하지만 역사의 아픔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일을 차마 감당하지 못하고 언제나 역사를 비껴간다. 안기부, 민주화운동, 고문, 정치공작, 빨갱이 사냥, 공수부대, 학살, 시민군 항쟁… 이러한 말들로 표현되는 한국의 현대사는 독자적인 생명력을 잃어버린 채 흔해빠진 이야기를 ‘있어 보이게’ 치장해줄 극적 소재들의 집합물, ‘눈물나는 슬픈 얘기’를 조립하기 위해 빌려온 원자재로 취급된다. 관객으로 하여금 산 역사와 정면으로 대면하게 해 줄, 그런 작가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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