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나, 말로 해서 될 일이면 쫓아가 때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최신식 슈트와 슈퍼카, 가면과 망토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무엇이 잘못 되었다 일러줄 때 그들이 듣는 척이라도 했다면 그토록 화가 나지도 않을 것이고, 무력감과 절망감을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토록 힘겨운 훈련들을 견뎌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이 세상이 좀 더 나아질 수 있겠구나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장 내게만 피해가 없으면 됐지, 하고. 지킬 것은 지키되 눈감을 것은 살짝 감으면 그 뿐이다. 누가 잘못을 하던 말던 그게 무슨 상관인가. 뒤에서 수군거리면서 그런 일이 있었대니? 걘 왜 그런데? 하고 수다 한판 떨어주면 그만이다. 나한테는 깍듯이 대하는데 무슨 상관인가. 누군가 가했고, 누군가 당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누가 자신과 좀 더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느냐이다. 당장 누가 자기한테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 또한, 몇몇 사건만 없었더래도 고담 시의 근본적인 악의 근원은 버려둔 채 떵떵거리는 재벌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법정에 서서 조근조근 말로 얼러대어 악을 밝혀내고 진실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면 애초에 치고 박고 싸울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거 아무리 봐도 말이 안통하는 거다. 별 수 있나. 타고난 재력을 가지고 최신 과학의 힘을 빌어 악을 처단해야지. 난 지금 개봉한지 좀 지난 영화, 배트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다.
그런데 요번 다크나이트를 보니, 배트맨의 고민이 그리 간단하지도 않더란 말이다. 그리고 한참 재밌게 영화를 보던 나도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니 왜 요즘 히어로물이 부쩍 늘었지? OO맨들이 많이도 늘었다. 잘 팔리는 장르, 히어로물. 이들은 자신이 가진 특장점을 이용해서 나름의 악을 처단해 주는데, 전후 사정을 다 아는 우리는 누가 선인지 악인지도 미리 알고 있으므로, 반드시 선이 승리할 것을 짐작하며 그 주인공이 바로 영웅임을 안다. 부서지기 위해 만들어진 세트장의 웅장함은 더욱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한다. 지친 대중은 현실에는 없는 히어로를 단지 소비하기를 원하며, 다행히 영화의 완결은 어느 정도의 희망을 던져준다.
이러한 히어로물의 유행은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더 이상 법과 논리, 상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다는 자각과 함께한다. 적어도 법과 경찰이 제 몫을 다 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을 때에는, 히어로보다는 어퓨굿맨 같은 법정영화가 더 인기있었을 것이다. 대화로서 풀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답답해하지도 않을 것이고 거리로 뛰쳐나가거나 뉴스를 보기 싫어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