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형제는 1903년 12월 17일에 12초 동안 36m를 나는 세계 최초의 동력 비행기 시험비행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를 취재한 신문사의 편집국장은 “그런 묘기가 일상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사실을 묵살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행기는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에는 전 세계를 1일 생활권으로 단축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속도와 관련되어 우리는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 빠른 것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며, 빠르게 변하는 정보·문화의 발전 방향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정신을 황폐화시킬 것이라는 생각이다. 특히 우리 국민들 속에 내재된 ‘빨리 빨리’라는 조급함은 ‘대충 철저히’, ‘아무렇게나 멋지게’라는 행동을 유발하고, 이것이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사고로 이어지는 총체적인 부실의 원인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느림>이라는 작품을 쓴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 (Milan Kundera)는 현대문명을 빠른 속도를 추구하는 집단 히스테리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현대 문명을 무한 질주하는 자동차나 오토바이에 올라 탄 사람에 비유하며,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시공간을 해체시키고 오로지 눈앞의 한 점만을 목표물로 보도록 만든다고 하였다. 그는 “속도는 기술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황홀경(엑스터시)”이라며 “이제는 고속도로의 갓길로 빠져 나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천천히 성찰하는 느림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최근에는 일상생활에 지친 많은 현대인들이 이러한 주장에 동조함으로써 사회적으로 느림의 미학이 점차 확산되고 있으며,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전원생활, 무소유(공동소유), 시간과의 단절, 템플스테이 등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빠른 속도를 추구하는 것이 그리 부정적인 일만은 아닌 듯싶다. 우리 인체는 외부의 자극을 초당 120m(시속 432Km)의 속도로 두뇌에 전달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조차 허용되지 않는 경우에는 두뇌에 전달하지 않고 척수에서 무조건반사를 명령한다. 우리가 알던 모르던 우리의 인체도 보다 빠른 정보전달체계로 진화해왔으며, 이것이 수천 년간 인류를 생존시킨 기반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토끼와 거북이’는 어렸을 적부터 우리에게 친숙한 우화이다. 비록 속도는 느리더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교훈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이 우화를 뒤집어보면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만일 토끼가 자만에 빠지지 않았다면 거북이가 아무리 성실히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토끼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점이다. 즉, 이 우화의 밑바탕에는 속도와 관련하여 토끼와 거북이에게는 숙명론적인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속도의 한계는 경험할 수 있는 물리적 범위의 한계를 규정하게 된다. 실제로 평생을 일만하다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의 경우 운송수단이라곤 두 발이 전부였던 그 시절에 태어나서 돌아가실 때까지 10리 밖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 분에게 있어서는 당신이 경험한 10리 안의 그 울타리가 세계의 전부였을 것이다.
  물론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가끔은 갓길로 빠져 나와 자신의 모습을 천천히 성찰하는 느림의 시간을 가질 필요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이는 속도를 통해 공간의 물리적·논리적 제약이 극복되면 스스로 달성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지금 이 글도 미국에서 작성하고 있는데, 이메일이라는 빠른 전송수단이 없다면 아마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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