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대와 도서관 본관 근처에 있는 '우리의 교육지표'선언문 기념비


   얼마 전 경찰이 촛불집회에 참가한 초등학생들을 연행하여 조사한 사건이 있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대한민국의 국민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권리를 완벽하게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하물며 폭력과 감시가 일상화된 유신 독재시절은 어떠했을까. 30년 전 6월, 학자적 양심으로 유신독재의 눈보라를 뚫고 마침내 진실과 자유를 외친 11인의 스승이 있었다.


1978년, 당국의 탄압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간 학원가

   1975년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한 정권은 대학에서의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교육공무원법을 개정해 국립대학의 신규교수채용은 계약채용제로 바꾸었으며 데모와 농성, 등교거부와 마이크 사용까지 금하는 등 대학생들의 시위를 막고 교직원들을 통제하려 했다. 당국의 탄압과 감시에도 불구하고 76년 가을부터 재개되기 시작한 학원가의 시위는 77년 봄과 가을로 이어지며 유혈사태로 확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이 연행되었고 60여명에게는 구석, 제적, 정학 등 징계가 가해졌다. 78년 들어서 학원가 시위는 소강상태에 접어들게 된다.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소수정예화 되고 학원가에 대한 탄압과 감시는 더욱 노골적이고 폭력성을 띠게 됐다. 대학 캠퍼스마다 중정요원들과 사복형사, 형사 기동대가 포진하고 있었으며 진실을 말하는 교수는 교단을 떠나야 했고 그 자리는 곧 정권의 비호를 받는 어용 교수들에게 돌아갔다. 어용 교수들은 단지 정권의 지시와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닌, 학생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학사적 불이익을 통해 학생들의 시위를 막는 경찰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학문 연구 활동보다는 정권에 대한 충성심으로 교수의 자질이 평가되던 그 당시, 창조적이고 비판적이고 민주적인 교육풍토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우리 학교 역시 당국과 정보기관의 감시 아래 침묵과 복종만을 강요받고 있었다. 캠퍼스에는 경찰과 중정관계자가 상주하고 있었고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한 지도교수제를 실시해야 했고 교수들은 학생들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당시 이러한 지시를 받은 교수들은 심한 분노와 자괴감, 모멸감을 느껴야 했다.


전남대 교수 11인, 희망과 자유를 외치다

   “우리 사랑하는 제자들이, 어제 있던 제자들이 오늘은 없는 거예요. 또 학교를 떠나야 하는 거예요. 그것을 교수들이 가결해가지고 퇴교를 시키고 그 학생이 나가서도 또 탄압 때문에 죽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5․18 묘지에 묻혀 있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교정에서 분신자살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교육자 입장에서, 그 선생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이 마음이 편하겠어요?” 11인의 교수 중 한 명인 이석연 교수(사학․2003년 정년퇴임)의 말이다.

   정권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학생과 국민들의 비판의식을 제거하려는 교육헌장에 반대하는 교수들은 ‘우리의 교육지표’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여기까지 이르는 데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선언문의 초안은 당시 서울대에서 해직되고 <창작과 비평>잡지 발행인으로 있었던 백낙청 교수가 작성했다. 서울 대학들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상경한 전남대의 송기숙 교수(국문학)는 안면이 있던 백 교수를 방문하였고 이 날 서울대 안병직 교수(경제학)와 만나 의기투합하여 교수들의 행동을 촉구하고 규탄성명을 내는 것으로 교수들이 목소리를 낼 것을 결의했다. 처음에는 신중하게 진행됐으나 해직교수협의회를 이끌던 성내운 연세대 교수가 가세하면서 상황은 급진전하게 된다.

   성 교수는 서울 대학 55명 교수들의 서명을 받고, 광주에서는 송 교수가 서명을 받기로 하여 전남대학교에서는 이석연․이홍길 교수(사학), 김두진․홍승기 교수(국사교육), 명노근․김정수․배영남 교수(영문), 김현곤 교수(불문), 안진오 교수(철학), 이방기 교수(법대) 총 11인의 교수가 서명하고 송기숙 교수가 대표를 자임했다. 그러나 성명서 발표를 앞두고 대학 내 사정과 교수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였다. 어느 학교를 먼저 발표할 것인지를 놓고 논의하던 중 발표로 야기될 피해와 후유증으로 인해 대학들이 이탈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서울에서 합의된 성명서는 발표되지 못하였고 일은 여기서 끝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송기숙 교수는 “당시 광주로 돌아오니 교수들은 안기부의 매타작의 악몽에서 깨어난 듯 환한 표정을 지었다”고 전한다. 안기부에 대한 공포는 누구를 막론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사건은 엉뚱하게 불이 붙게 된다. 성내운 교수가 ‘우리의 교육지표’에 서명한 11인의 전남대학교 교수들의 성명서만을 기자에게 전달했고 그로 인해 사건이 언론에 공개됐다. 언론에 발표된 직후 너무나도 큰 사건이 서울이 아닌 지방 광주에서 주동한 것으로 되어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교수들의 교육현실에 대한 비판을 체제 도전적인 의미로 보고 가혹한 수사를 가하였다. 교수들이 연행됐다는 소식은 곧 교내와 온 광주시내에 퍼졌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이러한 정국 가운데서도 양심을 지키는 학자요, 존경받는 스승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격하였고 그런 교수들이 연행되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28일에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앞 잔디밭과 광주 시내 YMCA강당에서 행해진 연행된 교수를 위한 기도회는 이러한 광주 시민들의 민심이 잘 표출된 행동일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이홍길 교수(사학)는 “당시 중앙정보부의 수사과장에게 인계되었을때는 ‘젊은 자식이 후배교수들 격려는 못할망정 후배 교수들 꼬셔가지고 못된 짓을 하고 그런다. 사정없이 조져버려라’라고 사납게 대하더니 밖에서 학생들이 데모하고 난리가 났는지 송기숙 선생만 남기고 나머지 선생들은 얼른 내보내 학생들을 무마시키려고 했었다”고 술회한다.

   29일이 되자 전남대학생 노준현 군(당시 화공학2, 2001년 작고)을 중심으로 교수 석방을 주장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학생들은 ‘학원사찰 중지, 교내 기관원 철수, 어용교수 직위해제, 교수 석방’을 외치며 도서관을 점거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은 페퍼포그를 발사하며 도서관 안으로 진입해 곤봉을 휘두르며 강제해산시켰고 경찰차로 연행해갔다. 30일 등교한 학생들은 7월 5일까지 휴교한다는 공고와 함께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하고 강제 귀가시키는 기동경찰을 보게 된다. 해산하지 않고 1천여 명의 학생이 모여들자 경찰은 곤봉을 휘두르며 강제해산을 시도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경찰들을 향해 투석하며 저항했으나 경찰의 강경진압에 일시 해산하여 광주고 앞까지 행진을 벌이고 한국은행 앞에서 양림교회 앞에 이르기까지 집합과 해산을 반복해가며 시위를 계속해나갔다.

   특히 조선대 앞에서는 조선대학생과 전남대학생의 합류를 막고자 한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수십 명의 학생들이 부상당했다. 광주 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시위는 7월 1일까지 계속되었고 많은 전남대학생과 조선대학생들이 긴급조치 9호에 의거해 구속되었다. 7월 말에 송기숙 교수와 학생들에 대한 재판이 세간의 관심 속에서 진행됐으나 고등법원과 대법원에서 연이어 상소가 기각되어 송기숙 교수에게는 유죄가 선고됐다.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

   교육지표사건은 거대 언론마저도 침묵을 지키고 암울하기만 하던 교육현장에서 정권의 압력을 받아오던 교육자들이 스스로의 양심의 목소리에 부응했던 사건으로 참다운 민주교육과 사회정의를 위해 민주화 쟁취를 선언한 사건이다. 우리의 선배들이 용기와 헌신을 다해 시대의 의무에 부응했던 그날로부터 어느덧 30여년이 흘렀다.

   지난 6월 27일에 인문대에서 있었던 ‘우리의 교육지표’선언 30주년 기념식에서 강정채 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전남대인이 이렇게 겸손하지만 당당한, 바르고 품이 큰 사람으로 커갈 수 있는 피를, 그 유전자를 교수님들과 선배님들이 수혈해 주셨기에 우리 대학이 5․18항쟁의 진원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위험이 눈앞에 보임에도 불구하고 옳다고 여겼기에 행동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던 선배와 스승의 그 정신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얼마나 이어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민주주의의 정당성은 그것을 직접 쟁취하는 데에 있고 행동하지 않는 지성은 상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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