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그의 아름다움에서 발산되는 광채에 너무나 감동되어 그 이상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눈부신 그의 얼굴과 몸짓의 추억을 눈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뷰르캉이 나를 사랑해주기를 기도했다. 그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입장이 될 수 있도록 기도했다.’
  프랑스의 소설가 장 주네의 『장미의 기적』중 일부이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연애소설의 한 대목 같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묘사한 부분이라는 점에서는 여느 연애소설과 다를 바 없지만 사랑을 나누는 주체가 두 남자라는 점에서는 일반 연애소설과는 다르다. 남자인 주인공 ‘나’가 남자인 뷰르캉의 아름다움에 감동되어 그가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란다? 흔히 접하는 일반 소설책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대목이다. 하지만 위에서 묘사된 것처럼 실제 동성애자의 사랑은 이성애자의 사랑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동성애자를 성도착자나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많다. 사회의 약자인 빈민, 농민, 장애인, 여성의 인권에 관심 갖는 사람조차도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잣대로 그들을 바라본다. 하지만 이성애자들이 자연스럽게 자신과 반대되는 성에 끌리는 것처럼 동성애자 또한 자연스럽게 자신과 같은 성에 끌릴 뿐이다. 단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성애자이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의 사랑을 이성애자의 그것과 다르다고 보고, 그것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최근 <한겨레 21> 에서는 성정체성 혼란과 ‘아우팅’(남들에 의해 자신의 성정체성이 폭로되는 것)의 공포 때문에 자해하는 10대 동성애자들의 현실을 고발하였다. 한 자해 사이트에 평소에 여자이기 싫다는 생각을 해왔다는 17세 여고생이 “엄마 손에 이끌려 정신병원에 갔다가 의사에게 ‘혹시 이성에게, 남자에게 연애 감정을 느껴본 적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를 정신병자 취급하는 병원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어 뛰쳐나왔다”는 글을 올라왔다는 내용과 함께 10대 레즈비언 166명 가운데 성정체성 혼란, ‘아우팅’의 공포 때문에 자살을 기도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58.5%라는 설문 결과를 보도하기도 했다. 이처럼 잘못이 없는 동성애자들을 학교 밖으로, 가정 밖으로, 심지어는 자살로 내모는 것은 이성애자들의 편견 때문이다. 다수의 편향된 시각이 성적소수자에게는 폭력으로 다가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두 엄마-거의 행복한 어느 가족 이야기>라는 책을 쓴 스페인 작가 무리엘 비야누에바 페라르나우는 실제 동성 커플인 두 엄마와 함께 살았다. 이 작가는 자신의 삶이 힘겨웠던 진짜 이유는 레즈비언 커플인 두 엄마와 함께 살아서가 아니라 자기 가족을 정상적으로 바라봐 주지 않는 환경 때문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앙드레 지드, 보들레르, 셰익스피어, 소크라테스도 동성애자였지만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말하지 못했다. 동성애자를 비정상인으로 내모는 사회의 편견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동료, 가족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5월 15일 미국 캘리포니아 대법원에서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합법화했다. 또 스페인에서는 이미 2005년에 동성간 결혼과 입양이 합법화되어 다른 이성애자 부부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고 있다. 우리 사회도 성적 소수자의 인권이 보장되고, 다름이 차별로 이어지지 않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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