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최초의 문학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라고 한다. 트로이 전쟁을 그린 이 서사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이 좋은 봄날에 그 길고 지루한 전쟁담을 굳이 펼쳐들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고대인들에게 ‘훌륭한 삶’의 교과서 노릇을 했던 이 시의 주제가 사랑도 행복도 예의범절도 아닌 ‘분노’라는 데에는 잠깐 눈길을 주어도 좋겠다.
  사람마다 웃음 포인트가 다르듯 분노의 기점도 다르다. 아킬레우스를 분노하게 한 것은 처음에는 자존심을 건드린 아가멤논이었고 다음에는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적장 헥토르였다. 어떤 사람은 자는 걸 깨우면 화를 내고, 어떤 사람은 식사를 방해하면 화를 낸다. 남이 시간 약속을 어길 때 유독 화를 내는 사람이 있고, 다른 건 다 참아도 가족을 욕하는 것만큼은 못 참는 사람이 있다. 상점 주인의 불친절에 화내는 사람, 일방적인 업무명령에 화내는 사람, 전화해주지 않은 연인에게 화내는 사람, 선배의 무례함에 화내는 사람… 분노의 이유는 수없이 많다. 어떤 이에게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다른 이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생각하면 분노는 적나라한 자기표현이다. 나의 소중한 것을 누군가가 침해할 때 나는 분노한다. 따라서 나의 분노는 내가 소중히 아끼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아킬레우스에게 그것은 명예와 우정이었다.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재산이다.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친구다. 사람들은 저마다 시간을 아끼거나 자존심을 아끼거나 또는 성공을, 연애를, 건강을, 갈등 없는 삶을 소중히 여긴다. 그리고 그것이 침해당할 때 분노한다. 그러므로 분노에 대한 성찰은 삶에 대한 성찰이다. 내가 언제 분노하는지 돌아보라. 그러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될 것이다.
  이 좋은 봄날에 한국은 분노의 물결로 가득하다.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던 새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내각은 부도덕한 땅부자들로 채워지고 학교는 점점 더 무한경쟁의 전쟁터로 전락할 판국이며 멀쩡한 산과 강은 난데없이 공사판이 될 분위기더니, 이젠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불안한 쇠고기를 수입한다며 “안 사먹으면 그만” 운운하니 폭발해버렸다. 국가와 시장이 소중한 것을 위협할 때 사람들은 그에 맞서 분노한다. 시민들이 언제 분노하는지가 그 사회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인지를 말해준다.
  쇠고기 협상에 대한 분노는 사람들을 ‘목숨을 지키기 위한 싸움’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소중한 것의 마지막이 ‘목숨’은 아니다. 분노가 크고 깊을 때, 지켜야 할 무언가가 한없이 소중할 땐 ‘목숨을 건 싸움’에 나서는 이들도 있다. 아킬레우스가 그랬고, 80년 5월의 시민들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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