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으로 돌아가자’는 뜻 가지고 연구에 매진
  왕년에 ‘전남대 데모 터줏대감’, ‘전남대 데모 대장’답게 그의 말투는 굵고 강했다. “그거 뭐, 그냥”이라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겸손해 했다. 그런데 그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가 다산과 이야기하고 있는지 박석무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혼란스러워졌다. 그에게는 ‘전남대 데모 대장’이라는 이름표 말고도 또 다른 이름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다산의 얼굴이 오버랩 됐고, 다산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주변 사람들도 그에게 ‘박다산’이라고 부른단다. 그도 그 자신이 다산인지, 박석무인 지 정체성에 혼란이 오지 않을까. 다산의 뜻을 세상에 전파하는 것을 하나의 사명으로 여기며 평생을 다산을 연구해 온 그는 진정 ‘이 시대의 다산’이었다.


다산과의 첫 인연…언제 인지 모르게 만나

 
  그와 다산과의 첫 인연은 언제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다. 학생 시절, ‘사상계’라는 잡지를 즐겨봤다. 잡지에 실학자와 관련된 내용 등에 대해 있었는데, 그 때부터 그는 진보적인 생각을 갖은 조선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 반계 유형원 등과 인연을 맺게 된 것.
그는 법학과에 들어갔지만 처음부터 사법고시에는 생각조차 없었다. 당연히 ‘학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법학대학원에 진학했고, 한문을 잘 아는 그에게 당시 법대 교수들이 ‘한국 법제사’ 공부를 해보면 어떠냐고 권유했다. 그 때부터 그의 본격적인 다산 연구는 시작된다. 다산의 저서 중 ‘경세유표’와 같은 고서(古書)를 읽으며 다산의 매력에 매료되기 시작한다. 학부 시절, 치열했던 운동만큼이나 치열하게 다산에 대해 연구했다.
그런데 문득, 그와 다산과의 첫 인연은 그의 아주 어린 시절, 어쩌면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산을 잘 모르던 시절에도 ‘다산의 뜻’에 따라 청렴·결백하지 않은 것들에 저항하고 깨끗한 세상을 꿈꿨기 때문이다. 아니면, 혹시 그가 ‘다산의 분신’일까?


치열했던, 치열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


  그의 대학 시절은 시위와 운동으로 얼룩져 있다. 박정희 군사 정권 때여서 치열했고, 치열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시대는 그를 ‘데모 대장’의 길에 들어서게 했다.
“대학 시절 때 운동을 많이 했었냐”는 기자의 질문이 무색하게 “했기 뿐인가? 내가 제일 앞에 나서서 주동하고 그랬지 뭐” 그래, 이토록 강하고 굵은 말투, 올곧은 정신의 소유자는 ‘주동자 감’이지. 뒤에 서면 아깝겠구나. 치열했던 학생 시절이 막을 내리면, 지독한 독재 정권도 막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니었다. 대학원 졸업 후에도 1973년 유신반대 유인물인 전남대학교 ‘함성’지 사건에 연루돼 1년 동안 복역하게 된다. 그러나 이 때가 오히려 그에게는 “주옥같은 시간들이었다”고. 교도소에 갇혀 다산의 5백여 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들을 읽어 내려갔다. 교도소의 혹독한 추위도 그의 ‘다산 열(熱)’을 식힐 수는 없었고, 그 곳의 혹독한 더위도 그의 차가운 이성을 녹일 수는 없었다. 그가 말하길 “오히려 내게는 소중하고 고마운 시절”을 보내고 다산 연구서인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를 세상에 내놓는다.


아름다운 ‘박석무 선생님’


  그는 대학 졸업 후 영어 교사로 활동한다. 그 중 6년간의 대동고등학교 교사 시절, 그가 가르쳤던 제자들은 그를 ‘정의의 사도’ 정도로 기억한다.
“나는 전혀 애들 선동하거나 뭐,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지 않았어. 그냥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해야 한다’, ‘사나이라면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 뭐 이런 당연한 말들 했을 뿐인데 애들이 그렇게 기억해 주니 고맙지 뭐”
박동문의 저력 때문인지 운동권의 중심 세력에는 항상 대동고 출신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결코 제자들을 선동하거나 사상을 주입시키지는 않았다고 한다.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차지 한다’는 엉터리 진리 대신 ‘용기 있는 자만이 자유를 쟁취 한다’는 제대로 된 진리를 제자들에게 전파해주었기 때문. 그는 아직도 제자들 사이에서 신화적 인물로 기억된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운동에 참여하려는 고등학생들에게 ‘이 문을 나가려거든 나를 밟고 나가라’고 했던 극 중 역은 박석무를 모델으로 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는 다산을 연구하기에만 그치지 않고, 다산을 연구하기 이전부터 ‘다산의 삶’을 살고 있었는지 모른다. ‘깨끗하게, 맑게, 자신 있게!’

“다산으로 돌아가자”

  그는 13대, 14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그 스스로 ‘다산으로 돌아가자’고 다짐한다. ‘다산으로 돌아가자’는 메시지는 박석무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문구이기도 하면서 시대에 던지는 의미 있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사실 이 시대는 눈 뜨고는 못 봐줄 만큼 더럽고 부패해있다. 정치인들은 돈 자랑하듯 자신들과 엮인 비리들을 하나 둘 내놓고, 정치인뿐만 아니라 정부 관료란 관료들 거의 대부분이 깨끗하지 못하다. 이런 시대에 그는 다산의 이름을 빌려, 다산의 뜻을 목이 쉬도록 이야기 한다. 그는 『풀어쓰는 다산 이야기』에서 ‘세상이 타락하면서 재주나 덕망도 없이 높은 지위에만 오르면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데, 능력의 부족으로 민생이 파탄 나고 인권이 짓밟히는 일이 반복되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시대를 꼬집고 있다. 『풀어쓰는 다산 이야기』는 어쩌면 ‘다산과 박석무 이야기’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세상의 부패함과 더러움에 분노해서 글을 쓸 때가 많다”고 하니…….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관계가 이와 같았을까. 박석무 그는 실제로 “다산이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곧 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제는 다산이 그 안에 체화되어 그가 하는 이야기는 박석무가 하는 이야기 일 수도, 다산이 하는 이야기 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 그 어느 때 보다 행복하다. 지금껏 치열하게 싸우고 저항해 왔지만 모든 것은 결국 ‘다산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는데, 지금 그 어느 때 보다 더 열심히 다산 연구에 몰두하고 다산의 뜻을 전파하는 데 앞장서고 있기 때문이다. “다산을 알리고, 다산의 사상을 보급하고, 연구하고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남은 생 동안 내가 해야 할 일이지”
세상이 이처럼 어지러울 때 일수록 다산이 더 절실하고, 박석무가 더 절실하다. 그의 다산 연구 투혼이 이 시대와 이 시대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다산으로 돌아간 시대’가 되어 그가 더 이상 ‘박다산’으로 살지 않아도 될 날이 오길 바란다. 그도 그럴 것이, ‘박다산’, ‘박다산’하며 그를 찾고 부르는 소리가 한 편으로는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플 테니.

 박석무 동문은…
1962년 우리 대학 법학과 입학
1970년 법학과 졸업
1970년 우리 대학 법학대학원 입학
1972년 대학원 졸업
1998년 ~ 2001년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장
1988년 ~ 1992년 제13, 14대 국회의원
현 다산연구소 이사장
현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주요 저서로는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한길사)』, 『풀어쓰는 다산
이야기(문학수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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