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공교육체제’라고 부르는 학교제도는 18세기 시민사회에 기반한 근대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시작된다. 한편으로는 그때까지 일부 계층만 누려오던 학교교육의 혜택이 계층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분배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개념의 민주국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유능한 국민을 기르는 일에 국가가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공교육체제가 확립된 현대에는 학교 바깥의 상황과 관계없이 원만한 사회의 유지를 위하여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지식, 기능, 태도들을 학생들에게 고루 길러주는 것이 공교육의 중요한 임무가 되었다. 모든 이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특수한 지식이나 기능들은 공교육이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하여 습득하게 되는데, 학원, 훈련기관, 군대, 교회들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다른 경로’를 통하여 특수한 지식이나 기능들을 길러주는 사람들과는 달리 공교육을 담당하는 이들을 우리는 ‘교육자’ 혹은 ‘스승’으로 불러 특별한 예의를 갖추어 대해왔으며 이것은 다른 나라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까닭은 이들이 특수한 지식을 가르치면서도 자신들이 가르치는 내용들이 학교에서 가르쳐지는 다른 내용들과 어울려 모든 학생들의 온전한 성장에 기여하도록 한다는, 흔한 표현으로 학생들의 ‘전인적 성장’에 기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학을 잘 가르쳐 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얻게 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나 어쩐지 ‘교육자’나 ‘스승’이라고 부르기 힘든 사람들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최근 학교자율화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조치들은 입시나 성적과 같은 학교 바깥에서 정한 기준에 맞추기 위하여 경쟁과 효율이라는 경제논리를 도입한 것들이다. 어떤 나라에서건 기업에 투자하면 훨씬 많은 이익을 되돌려줄 엄청난 금액을 눈에 보이는 효과를 돌려주지 않는 교육에 투자하고 있는 것은 경제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교육의 공공성 때문이다. 교육의 논리가 경제논리로 대체된 후에 우리의 선생님들은 더 이상 ‘교육자’나 ‘스승’이기를 포기해야 할 것이어서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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