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0여년 전 대선에서 나와 개인적으로 가까운 대통령후보자에게 투표한 적이 있다. 이때 그 후보자와 나만큼이나 가까운 친구와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친구는 ‘국가의 관점에서 적임’ 여부를 기준으로 투표해야 하며 ‘개인적인 친소(親疎)’가 기준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때의 일은 두고두고 ‘정당하게 투표권을 행사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내 마음에 남겨놓았다.
  그런데 올해 총선거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투표장 입구까지 갔지만 나는 투표를 하지 않은 채 투표를 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나와 논쟁을 벌인 사람이 없었으므로 마음 속으로만 ‘투표권 불행사(不行使)가 의무위반인가?’라는 가벼운 의문이 내게 남겨졌다. 투표권 행사의 기준은 무엇일까? 투표의 의무는 어디까지인가?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생각을 가볍게 내보이고 싶다.
  투표행위가 공적(公的)인 행위임은 분명하겠다.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은 일반적으로 잘못된 기권(棄權)이 되겠다. 의견에 대한 찬반투표가 아니라 선거라면 선택할만한 후보자가 없다는 것은 기권행위를 정당화하지 못하며 주어진 범위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투표권 불행사도 하나의 의견표시로서 존중되어야 할 것 같다.
  지난 총선거에서, 내가 보기에는 지지할만한 후보자가 아주 현격한 차이로 반대 입장의 후보자를 누르고 당선될 것이 예견되었고, 이러한 선거결과의 편중현상 자체가 다양성을 중시해야할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현상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반대입장의 후보자를 지지할 생각은 도저히 생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투표권 불행사를 선택한 것이다. 79세의 노령이신 나의 어머니께는 대중적 행사에 참여하시는 것이 나름대로 의미있어 보였다.
  의견에 대한 투표라면 공동체의 이익을 유일한 기준으로 하여 투표권이 행사되어야 한다는 데에 이론이 없겠다. 그러나 선거에 관한 투표라면 공동체의 이익은 매우 중요한 기준이겠지만 유일한 기준은 아닐 수 있겠다. 대통령선거 정도의 광역선거에 있어서는 어차피 개인적 친분이나 이익집단의 이해가 선거에 반영됨을 전제로 하고, 그것은 공적으로 존중될만하겠다. 후보자 개인과 인간·학연·지역·직역(職域)의 이해관계와 공동체의 이익판단의 결과를 종합한 것, 그것이 선거결과가 아닐까? 나로서는 대선에서 개인적 친분의 후보자를 지지하지 않고서는 다음에 그를 다시 만났을 때에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 분명하고 ‘배신의 죄책감’을 마음 속에서 지울 수 없을 것 같았다. 입장을 바꾸어 내가 후보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나는 분명히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내가 그 후보자를 지지하지 않았을 때에는, 선거 후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에 지지한 듯한 태도를 취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부도덕하며, 그 후보자와 선거를 얘기할 상황이 되었을 때에 선거 비밀이라는 공적인 원칙을 내세우는 것도 ‘웃기는 얘기’이며, 그렇다고 감히 ‘내가 당신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내 배짱과 가치관으로는 불가능하다. 설령 내가 공적으로 잘못된 투표행위를 했을지라도 앞으로 같은 상황이 되면 그러한 행위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금 투표율의 저조와 주권자의 정치외면이 극복되어야 할 과제로 되어 있는 마당에, 또 투표권을 가지는 입장과 공익을 외면한 채 개인적인 친소와 학연을 기준으로 투표권이 행사되는 폐단이 우리 사회의 현안으로 되어 있는 마당에, 내가 좀 엉뚱한 방향으로 생각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거꾸로 이러한 역방향의 생각이 현안의 폐단을 생각하는 데에 간접적이고 유연한 촉매제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예컨대, 학생회장선거나 총장선거에서 이유 없이 기권하면서 그것도 하나의 권리라고 자위하거나 학연에 따라서 또는 장차 ‘한 자리’를 기대하여 투표권을 행사하고도 투표의 다중성과 비밀성 뒤에 숨어버린다면, 그것은 앞서 말한 ‘한계적(限界的) 논점’과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며, 그 자잘못은 명백하지 않을까?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