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여행 중이었다. 여행의 언저리에서 그를 만났다. 삶 자체가 여행이기에 여행 중에 만난 게 맞겠지. 그는 여전히 노래하고 있었으며, 시를 읊고 있었고, 춤추고도 있었다. 어디에선가 그를 본 것 같았고, 그의 목소리도 들어본 것 같았다. 참, 인도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에서 그를 보았고, 바람 소리를 통해 그의 목소리를 들었었지. 그의 얼굴은 인도빛이고, 말투는 전라도였으며, 마음은 세계적이었다. 그의 이름은 양희, 박양희다.

인도를 꿈꾸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은 이제 식상하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실감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의 추천으로 ‘세계사 편력’이란 책을 읽었다. 인디라 간디의 인도주의에 감동했다. 언젠가 한 번 인디라 간디가 살았던 곳에 가고 싶다,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 꿈을 잠시 잊고 살았었다. 대학 시절 내내 학생 운동을 했다. 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를 동경하고 진정한 자유를 꿈꾸면서. 그 시절 5월에는 수만 명의 사람들 앞에서 오르간을 치며 그들의 밑소리를 내줬다. ‘임을 위한 행진곡’ 등 시위 곡들 반주를 했다. 그는 그 때가 ‘내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라 회상한다.
  그러다 대학 졸업 후 세상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무엇을 해도 의미가 없고, 와 닿지 않았다. 80년대를 겪었던 사람들이 비슷하게 겪는 공황 같은 것이었을까. ‘인도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인도의 사막에 누워 밤하늘 가득한 별들이 뜨고 지는 것을 보는 것이 그의 첫 번째 소원이었고, 인도 공동체 ‘아슈람’에서 살아보는 것이 그의 두 번째 소원이었다. 세 번째 소원은 타지마할에 가보는 것이었다.

인도에서 ‘박양희’를 찾다

  계획 없이 떠났다. 1995년이었을 것이다. 목적지는 ‘인도’였다. 아니, 어쩌면 그의 목적지는 인도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무언가 얻기 위해 떠나면 곧 잃고 돌아오는 법. 얻고자 하는 것이 없었기에 그는 그곳에서 가장 큰 것을 얻어왔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지나가는 말로 “나는 내가 역마살이 꽤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구. 인도에 있다보니까 그냥 가만히 ‘퍼질러’ 있는 것이 좋더라구요”라고 말했다. 사막에 누워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 천지에서 ‘박양희’ 별을 찾아보기도 하고 그 별이 가야 할 길을 짐작해보기도 했다. 또한 까마득한 별 천지에는 다만 ‘박양희’ 별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의 별도 있다는 것도 느꼈을 테다. 그래서 그가 인도에서 얻은 것은 자기 자신이었고 그의 목적지는 결국 ‘박양희’가 됐다.
  “고생도 많이 했어요. 지금 다시 돌아간다고 하면 못하지. ‘짜순이’, ‘밥순이’였어요” 인도 전통차인 ‘짜이’를 친구들에게 자주 타줬다. 우리로 치면 커피 타주는 ‘미스 김’ 정도 될까. 그러나 우리의 ‘미스 김’과는 차원이 다르다. 온 몸으로 노래를 하고, 온 힘을 다해 세상과 인도를 느꼈다. 인도 온 지역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는 ‘바울’과 함께 바람처럼 떠돌았다. 한 나무 그늘 아래 하루 이상 머무르지 않는 바울로서 떠돌며 노래하고, 춤추고, 느꼈다. 그는 최초의 한국인 ‘바울’이었다. 아니, 어쩌면 ‘최초의 한국인’ 따위의 수식어는 그에게 필요 없을지도. 그는 ‘바울’이다.

영혼을 위로 하는 노래, 그 노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인도 박물관에서 흘러나오던 그의 노래 가사다. 이야기 하는 내내 그는 노래를 불렀더랬다. 그의 말은 곧 노래고, 그의 노래는 곧 말이다. “응애, 응애” 태어나면서부터 노래를 했는지 모른다. 자신을 낳아주느라 고생한 부모님을 위로한 첫 노래가 울음소리였는지도. 그에게는 ‘어디서부터’라는 것이 없다.
  그와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마음이 평온해졌다. 조심조심,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을 걷듯 흘러나오는 목소리, 그런 그의 목소리에 몰입하게 했다. 노래를 하기 위해 타고난 목소리랄까. 문득, 왜 그가 노래를 하는지 궁금해졌다. “큰 거 없어요. 그냥 내 노래 듣고 사람들이 위로를 얻고, 편안해졌으면 하죠. 그게 다에요” 큰 이유 없다고 했지만 욕심쟁이 같았다. 남들에게 노래로써 위로를 준다면 듣는 사람에게도, 노래를 하는 사람에게도 얼마나 큰 행복일까. “한 번은 공연 전날 내가 너무나 힘든 일이서 거의 노래를 ‘끄집어내다’시피 해서 공연을 했어요. 그런데 공연을 하고 나서 며칠 후에 어떤 아주머니께서 나를 찾아오셨더라구. 그 때 자기한테 너무나 힘든 일이 있었는데 내 노래를 듣고 위로를 얻으셨다고. 공연 한 날 이상하게 노래를 하고 나서 기운을 많이 받았는지 공연하고 나니까 기운이 났었는데, 그 날 모인 사람들이 나한테 좋은 기운을 많이 줬나봐요” 그는 노래를 통해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기도 하고, 거꾸로 자기의 영혼을 위로받기도 한다. ‘노래’는 박양희에게 나눔이고, 영혼과 영혼의 교류이기도 하다.

시를 노래하다, 노래로 시를 하다

  그에게 노래는 곧 ‘시’이기도 하고, ‘시’는 곧 노래이기도 하다. 인도에 가기 전부터 시 노래를 불렀다. ‘이 고개 저 고개 개망초 꽃 피었대…얼크러지듯 얼크러지듯 그냥 그렇게 피었대’ 인도에 가기 전에도 유강희 시인의 시 ‘개망초’를 노래로 불렀다. 시 노래를 부르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시’는 곧 ‘노래’고, ‘노래’는 곧 ‘시’이기 때문에. 인도에 다녀와서도 ‘시하나 노래하나’ 음반에 참여하고, 시를 노래하는 ‘포엠 콘서트’를 진행하는 등 시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시는 예술의 맨 꼭대기에 있기 때문일까. 그는 그냥 ‘가수’, ‘예술인’으로 불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시인 타고르’가 아닌 그냥 ‘타고르’로 불리는 것처럼 그도 그냥 ‘박양희’ 그 자체로 살고 싶다고.
  여유 가득한 얼굴을 가진 그는 “앞으로 더 느리게, 더 한가롭게 살고 싶다”고 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에 대한 반항일까. 아니다. 인도에서 어떠한 느림의 미학을 배웠을 테다. 더불어 인도에서는 시간대별로 다른 노래를 부르는데, 그도 그렇게, 아침에는 아침 노래, 점심에는 점심 노래, 저녁에는 저녁 노래를 하고 싶단다.
  어떤 이는 박양희에게 ‘팔자 좋다’고 하겠지. 그러나 우리가 어디 박양희처럼 ‘못 살아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안 살아서’지. 부러우면 당신도 그렇게 살라. 온 몸으로 자연을 느끼고 시간을 품으며 별을 헤아려도 보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서.

박양희 동문은…
1986년 우리 대학 독어독문학과 입학
1990년 독어독문학과 졸업
1995년~ 인도 샨티니게탄 등지에서 생활
2002년~ 귀국하여 ‘시하나 노래하나’ 등 시 노래 음반 참여
시를 노래하는 ‘포엠 콘서트’ 진행
현 아시아문화교류재단 이사
대표 음반으로는 「나무의 venares」, 「영원한 아름다움이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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