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다문화가정’에 관심많은 시절이 또 있을까 싶다. 실제로 그들과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 말고도, 이들을 연구하거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계몽’하려 달려드는 집단이 얼마나 많은가. 일례로 요즘 문화단체에서 지원을 받으려거든 무조건 소외계층 아니면 다문화가정을 대상으로 해야 될까말까 한다는데.
그 많은 프로그램이 진행되어도 그간 쌓였던 국제결혼이주여성에 대한 편견은 여전한 것 같다. 아직 본격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2세가 겪어낼 진통 또한 곧 드러날 터이다. 그들이 겪을 삶이 모방송사 TV프로그램 ‘사돈 처음뵙겠습니다’류의 화기애애함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이번 1월부터 2월까지 한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음악프로그램에서 어드바이저를 맡은 바 있는데, 이때 그 아이들이 어떻게 서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지 목격할 수 있었다.
  그것은 두 번째 수업 날, 아이들에게 명찰을 나누어 줄 때 일어난 일이다. 하나하나 아이들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그들은 일본~ 중국~ 필리핀~ 이렇게 목청껏 외쳤다. 그 아이들의 국적은 거의다 한국일 테지만, 아이들은 단 한번 그렇게, 돌아가며 어머니의 국적을 외쳤다.
  다문화가정이 아닌 아이들도 있었는데, 그들도 누구의 어머니가 어디 나라 출신인지는 다 알고 있었다. 한명이 명찰을 받으러 앞으로 나간 사이, 아이들은 웃으면서 그렇게 악을 썼다.
  그 다음에는 그렇게 명찰을 나눠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들이 어머니의 국적을 불러댄 것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행위처럼 보였고, 호명당한 아이들도 기분 나빠하거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일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들은 왜 이런 일에 익숙한가. 왜 익숙해야만 하는가. 내 질문은 바로 그것이다. 이건 마치 박정희시절에 경상도로 시집간 전라도여성에게 따라붙은 낙인과도 같다. 항상 약자는 자신을 타자의 시선에 노출시켜 증명해야 하지만, 정작 그 시선이 획득한 권력을 나눠받을 수는 없다.
  지금 이 사회는 아주 오래전부터 여러모로 유동적인 성격으로 변해왔다. 고전적인 계급이동은 물론이거니와 굳이 포스트모더니즘, 신자유주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러한 유동적인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이전에 존재했던 자와 떠나온 자, 곧 기득권자와 아웃사이더 사이의 갈등이다.
  이것은 특수하기 때문에 주목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관계’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다문화가정의 문제 또한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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