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의 ‘소리모아’스튜디오에서 ‘직녀에게’를 열창중인 박문옥 동문.

박문옥 동문은
▲1974년 우리 대학 미술교육과 입학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 동상 수상
▲2007년 박문옥 노래인생 30주년 기념 콘서트
▲현재까지 ‘소리모아’ 스튜디오 운영 중
▲대표곡으로 ‘직녀에게’, ‘양철매미’, ‘운주사 와불 곁에 누워’ 등.

가수 박 문 옥 동문 (미술교육·74)

우연히 캠퍼스 송 페스티벌 참가

형에게서 기타를 선물 받았다. 박문옥 동문에게는 캠퍼스가 하나의 커다랗고도 작은 무대였다. 그 때만 해도 대학 캠퍼스에서는 노래 운동의 차원에서 포크가 적극 선호되던 시기였다. 그의 노래는 기타 선물과 함께 시작됐다. 그 후 3학년 때 우연히 같은 미술교육과 후배들과 함께 셋이서 우리 대학 ‘캠퍼스 송 페스티벌’에 참가하게 됐다. 그게 인연이 되어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에 학교 대표로 후배들과 함께 나가 동상을 수상했다.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음악을 취미삼아 재미삼아 했다. 하지만 결국 졸업 후 미술 교사를 하다 단념하고 온전한 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그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던 박태홍, 최준홍 등과 함께 20여년은 ‘소리모아’ 그룹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광주에 있는 자신의 스튜디오 ‘소리모아’를 열어 가수 김원중, 정용주, 정세현 등의 음반 60여장을 연출하고 솔로로 활동하면서 작곡가와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내가 만든 노래를 다른 가수가 부른다거나, 내가 연출한 것이 호평을 받았다는 것보다는 내 목소리로 노래를 했을 때 관객들이 반응을 보이는 것이 가장 짜릿하고 재미있다”며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것이 가장 매력적이다”고 말한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음악을 찾다

‘직녀에게.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선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가 하는 노래엔 공통분모가 있다. 서정적이며, 서민적이고, 추상적이면서도 가장 구체적이다.
그는 ‘1980년’, ‘5월’, ‘광주’, ‘전남대’, 그리고 ‘박문옥’ 사이에서 그것들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어떤 음악을 해야 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래서 만든 음악들이 ‘직녀에게’와 같은 곡이 아닐까. “그 때 시대 상황을 진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 한다”는 그는 “R&B나 다른 종류의 음악도 좋지만 그런 종류의 음악을 하는 것은 내가 해야 하는 음악적 사명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우리처럼 된장 먹고 보리 뜯어먹고 하는 세대가 R&B를 잘할 수 없을 것이고 굳이 그런 것을 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다”고 말을 잇는다. 그래서 그는 그가 잘하면서도 대중가요에서는 소홀한 분야, 다른 사람들이 손 안대는 분야를 찾았다. “딱히 민중가요라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80년대 상황과 광주라는 지역적인 특성이 너무나 지극히 자연스럽게 내 노래를 민중가요처럼 보이게 했다”고 말한다.
또 “음악 활동을 주로 지방에서 했는데 그런 곳들이 대부분 민중판이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작곡하고 가수 김원중이 부른 ‘직녀에게’란 곡을 가장 좋아한다. “통일이라는 메시지와 노래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며 “그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불리어 지면서 사랑을 받았고 아직도 인기가 수그러들지 않는 것을 보면 굉장히 좋은 노래라고 생각 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스스로에게 ‘떡갈나무 이파리 뒤에서 흐르는 샘물 같은 그런 사람’, ‘현실에 충실하려고 했던 소박한 음악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미술에 천재적 능력 있다는 말에 속았어요”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이면 음악, 미술이면 미술, 여러 예술적 재능이 다분했다. 그 중에서도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를 부르는 것이 가장 좋았다”고 회상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미술교육과를 갈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고교시절 미술반 활동을 한지 한 달 정도 됐을 때 전국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그 후 미술 선생님이 ‘너는 미술에 천재적 능력이 있으니 꼭 미술 쪽으로 나가라’고 해서 미술교육과에 가게 된다. 졸업 후 3, 4년 동안 미술 선생님으로 지냈다. 그러다 그는 학교의 관료적인 체제에 염증을 느끼게 되고 그렇게 찾게 된 길이 음악이다. “처음 음악의 길로 가겠다고 했을 때 ‘왜 편한 길 두고 힘든 길로 가려 하냐’며 가족들도 반대하고 아내도 반대했어요.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어요”
가수, 작곡·작사가, 연출가 등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그는 “내가 꿈꾸었던 모습이 지금 내 모습”라며 “풍족하진 않지만 내 노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노래를 해주고 내 도움이 필요한 후배들에게 노래를 만들어주고, 내 음악을 후배들이 부르고…그것이 내가 그려왔던 성공이었어요”라고 말한다. 도전이라면 할 만큼 해본 그는 “지금까지는 예전에 내가 했던 음악을 들으면 부끄럽기 그지없어요. 앞으로는 정말 만족스럽고, 내 자신이 자랑스러워하는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이 마지막 내 꿈이에요”라고.

박수칠 때 떠나라? 박수칠 때 머물러라!

그가 살았던 시대는 유행가를 부르면 혼이 났던 시대였다. 그도 그 시대의 유행가를 즐겨 불렀기에 요즘 대학생들이 대중가요만을 선호하는 현상에 대해 “본인이 즐기고 삶의 에너지와 위로를 얻고 그 속에서 예술성을 찾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지요”라고 전한다. “하지만 대중가요 가수들이 얄팍하게, 돈벌이를 위해서 상업하듯이 음악을 하다 보니 음악의 깊이와 진실성 떨어지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더불어 요즘 학생들이 인디밴드 공연이나 포크 음악 공연, 연극 등의 공연을 보지 않는 것에 대해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젊은 사람들이 판을 자주 벌리고, 또 판에서 노는 기회를 자주 만들어야죠”라며 작은 문화 활동을 많이 할 것을 강조했다. 또 학생들에게 “유명한 스타나 공연만 흠모하지 말고 주변의 발표회를 후원한다던지 박수를 쳐주고 하는 노력 또한 필요해요”라고 조언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영화 제목이 생각난다. 영화 제목과는 반대로 그의 말마따나 작은 공연에 박수칠 때 그들, 공연가와 관람객 모두는 대학가에 머무르리라.
기회주의라는 말을 좋아한다는 박문옥 동문. 그가 정의한 기회주의란 “자신한테 기회가 왔을 때를 대비해 미리 실력을 쌓아 그 때 모든 것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 취업이니까 모든 젊은이들한테 취업을 포기하고 자기가 추구하는 이상을 좇아서 가난을 겪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거에요. 하지만 미리서 준비하고 자기의 실력을 쌓아가는 그런 후배가 됐으면 하죠”라고 말했다.
인터뷰 후에 그가 들려준 기타 선율은 그의 말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따뜻하고, 구수하고, 꿈을 이룬 자의 기쁨까지도 느껴졌다. 앞으로도 그가 낼 음반들에서 그의 올곧은 목소리와 아름다운 선율을 들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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