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는 알버트 슈바이처가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이호완이 있다. 이 동문은 인도네시아에서 병원을 개업한 한국인 의사 1호다. 한국 교민들을 진료 해주고, 약을 주러 왔지만 그가 진정 주고 있는 것은 ‘사랑’이었다. 마음까지 따뜻하게 치료해 주는 그는 의사답게 ‘건강’으로 시작해 ‘건강’으로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 이호완 동문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서울 메디컬 클리닉 진료실에서 현지 교민을 진료 하고 있다.
‘나날이’ 후회되는 ‘날나리’ 생활

67학번. 지금이 2007년도니까, 전남대학교에 입학 한 지 40년이 지났다. 그래도 그 때의 기억은 생생하다.
“‘The solus’라는 클럽을 의예과에 창립했어요. 그 때 나는 창립 멤버였지요. 그래서 공부는 뒷전. 매일 날나리 생활을 했어요. 의예과 2년 동안 허송세월 보낸거지요”
의사는 어떻게 됐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시험 때 마다 벼락치기 했어요. 수업도 열심히 안 듣고… 의예과 때는 교양 수업을 많이 듣는데 그 때 수업을 열심히 안 들어서 교양 지식을 제대로 쌓지 못한 게 지금 와서는 제일 후회되죠”
그러다 그는 갑자기 엉뚱하게 ‘태권도’ 이야기를 했다.
“태권도를 했으면 좋았을텐데…. 나는 지금도 나이를 많이 먹었는데도 인내심이 조금 부족해요. 젊었을 때 태권도를 했으면 인내심도 길러지고 건강에도 도움이 많이 됐을 거에요. 기자님도 운동 하나씩 하세요. 꼭”
그의 ‘건강’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동생 따라 인도네시아로…

그는 가난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의대를 졸업했지만 광주 시내에 병원 개업을 하기에는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어렵사리 학교 근처에 병원 개업을 해 운영을 하다가 사정이 어려워져 고향인 화순 능주에 개업을 했다. 그런데 갈수록 병원 사정이 힘들어졌다. 동생인 넷째 동생은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며 기반을 잘 잡고 살고 있었다. 그 때 동생이 병원 사업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때 이 동문은 ‘내가 가면 어떨까’하고 생각했다.
“병원이 잘 안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우리 네 식구 함께 와서 주말에 운동도 하고, 여유롭고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오기까지 많이 힘들었지요. 10여 년 전인 그 때 당시만 해도 인도네시아에 온 한국인 의사로는 내가 처음이었어요. 10개월 동안이나 절차 밟고 허가 받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지금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서울 메디컬 크리닉’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인 의사 혼자 운영하는 것은 불법이라서 인도네시아 현지 의사와 함께 운영하고 있단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의료 수준은 우리나라 의료 수준보다 3~40년 정도 뒤쳐져 있어요. 그래서도 많이 힘들었지요. 필요한 의료 장비도 많이 없고…”
그래서인지 현지에 있는 한국 교민들에게 이호완 동문은 처칠이나 나이팅게일, 그 이상이다.

“사투리 많이 써서 돌팔이 의사인 줄 알았대요”

그는 인터뷰 내내 유독 사투리를 많이 썼다. “근께, 내가 여그 와서 한국인 의사 1호였제” 조금만 더 심하게 썼다가는 전라도 사투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통역이 필요한 수준이다.
“처음에 왔을 때, 내가 사투리를 너무 많이 쓰니까 교민들이 다들 내가 돌팔이 의산 줄 알았나 봐요. 많이 힘들었어요. 이해도 안 해주고 인정도 안 해주니까. 그래서 한 때는 그게 심각한 고민이었어요. 내 아내도 나에게 ‘사투리 좀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지만 지금껏 살아온 말투를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꾸나요. 지금은 오히려 환자에게 친근하게, 자세히 설명 해주고, 목에 힘주지 않으니까 교민들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의 사투리는 보통 사투리가 아니다. ‘병을 고치는 사투리’다. 그날따라 그의 전라도 사투리가 더 구수하게만 들렸다. 그의 구수한 사투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치료를 했는데 생각처럼 잘 안되면 실망할 때도 있어요. 그런데 보람을 느낄 때가 더 많죠. 여기서 다른 의사들이 고치지 못한 병을 내가 고치게 되면 교민들도 좋아하고, 고마워하고… 그래서 나도 뿌듯하고요. 교민들에게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진료해요”

“한 때는 돈을 많이 벌고도 싶었다”

“자카르타에 오니 사업하는 한국인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성공한 사업가들을 보면서 ‘나도 한 번 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인지 돈을 한 번쯤 많이 벌어보고 싶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나는 사업가 기질은 없나 봐요. 그냥 가족끼리 건강하게 살다 가면 그게 최고의 행복이지요”
돈에 대한 욕심도 부려봤다. 그러다 곧 포기했다. 그의 말처럼 그에겐 사업가 기질은 없어보였다. 오히려 그는 생각보다 간단한 삶의 진리를 많이 알고 있어 사업가 보다는 선생님이 어울릴 것 같았다.
“남한테 해 끼치지 않고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해요. 요즘 학생들은 솔직해서 좋긴 하지만 너무 쉽게 표현을 해요.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말할 수도 있는데… 말을 좀 아꼈으면 좋겠어요. 입이 너무 가벼워서도 안 되고 행동을 너무 가볍게 해서도 안돼요”
끝으로 그는 “건강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서울 메디컬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엘리베이터 안 타고 계단으로 걸어 다녀야 그나마 운동이 된다”고 끝까지 의사로서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에게 진료를 받고 싶다면 지금, 인도네시아로 가보라.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마음까지 따뜻하게 진료해 줄 것이다.
▲ 이호완 동문과 서울 메디컬 클리닉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들

 

이호완 동문은…
1967년 우리 대학 의학과 입학
1978년 흉부외과 전문의
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서울 메디컬 클리닉 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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