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해 상하이 지사에서 천오성 동문을 만났다. 천 동문 앞에는 보해에서 판매하는 주류들이 늘어져 있다.
‘모두가 YES라고 할 때 NO라고 할 수 있는 사람’. 천오성 동문을 보고 있으면 이 광고문구가 떠오른다. 천 동문은 대학 입학시험 면접, 입사시험 면접에서 남과 다른 자신의 의견을 자신있게 말했고 그 결과는 ‘OK’였다. 이 같은 두둑한 배짱과 전라도 사람 특유의 의리와 정을 버팀목으로 천오성 동문은 현재 상하이 보해지사를 이끌어가고 있다.

공부는 뒷전이던 대학시절

  천오성 동문이 대학에 입학하던 81년은 본고사가 폐지되고 입학자 정원이 대폭 늘어난 시기였다. 처음 실시되는 터라 대학 원서를 쓸 때 치열한 눈치작전이 펼쳐졌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하향지원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 대학 대부분의 학과가 미달일 정도였다고. 천 동문은 “덕분에 공부를 안 하던 내가 전남대학교에 입학 할 수 있었다”고 농담 섞인 말투로 당시를 회상했다.

  천 동문은 대학시절 농대 뒤 줄줄이 늘어서있던 라면 집에서 친구들과 라면도 즐겨먹고 당구도 치면서 노느라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대학 시절 공부 안한 게 제일 후회스럽다”며 “다시 대학생으로 돌아간다면 열심히 공부해 전 과목 A+를 맞을 것이다”고 말했다.

  데모가 유난히 많던 그 시절, 강의실에 최루탄이 날아드는 상황을 보면서 천 동문도 가끔씩은 데모에 함께 참여했지만 뚜렷한 이념을 가지고 열심히 참여하지는 않았다. “뒤늦게 민주화에 대한 이념이 확실해졌다”는 천오성 동문은 “사회에 나오니까 대학시절 민주화를 위해 열심히 데모하던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전했다.

보해와의 만남, 남다른 전라도 사랑

  대학 졸업 후 우리 지역 주류기업인 보해에 입사한 천오성 동문은 전라도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강하다. 목포 본사에서 1년 정도 근무하던 천 동문은 이듬해 서울로 근무지를 옮겼다. 서울에서 근무해도 전남 기업이다 보니 구성원들의 대부분이 전라도 사람들이었고 전라도 사투리가 회사 내에서는 표준어였다. “아직도 사투리를 못 고치고 있다”는 천 동문에게서 전라도 사람의 정겨움이 묻어나온다.

  당시 전남에서는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던 보해였지만 다른 주류회사들이 함께 밀집되어 있는 서울에서 영업하고 홍보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 때마다 천오성 동문의 스트레스를 날려준 것이 바로 프로야구였다. 천 동문은 “최종 결승전은 항상 서울에서 했는데 회사사람들과 함께 해태타이거즈 응원도 많이 했다”며 “경기만 하면 이겨서 즐거웠다”고 웃으며 말했다.

  당시만 해도 도수 높은 소주가 대부분이었는데 다른 주류회사에서 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도수가 낮은 소주를 개발해 눈길을 끌었다. 이에 대응해 보해에서도 타제품과 차별화된 도수가 낮은 소주를 생산했는데, 그게 바로 ‘잎새주’였다. 그때 마케팅 팀장이었던 천오성 동문은 ‘잎새주’라는 브랜드를 만드는 일에서부터 컨셉을 정하고 사전조사와 광고 모델을 선정하는 일까지 담당했다. 여러 노력 끝에 결국 ‘잎새주’는 히트를 쳤다.

새로운 시장 개척을 위해 상하이로

  ‘잎새주’가 한창 히트를 치고 있을 무렵, 천오성 동문에게 한 가지 제안이 들어왔다. ‘상하이 보해지사를 맡아 보겠냐’는 제안이었다. 3일 동안 고민하던 천 동문은 아내의 반대가 있었지만 한국에 있을 때보다 자율성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어 중국행을 결정했다.
결정 후 일주일 만에 상하이로 건너간 천 동문은 처음에는 연락 사무소인 대표처로 시작해 영리행위는 하지 않고 1년 동안 시장 조사만 했다. 2003년부터 한국 주류회사로는 처음으로 해외법인을 가진 상하이 보해 지사로서 본격적인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보해에서 그 동안 미국이나 일본을 상대로 수출은 많이 했었지만 해외 지사로는 상하이 지사가 처음이었기에 천오성 동문에게는 그 의미가 컸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영업은 생각만큼 술술 풀리지만은 않았다. 한국 할인매장의 경우는 바코드비용만 지불하는 데 비해 중국 할인매장은 팔리든 안 팔리든 입점비를 내야했다. 심지어는 식당에서도 판매하려면 입점비를 내야하는 통에 이윤을 남기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천 동문은 “지금은 할인매장 내에 한국 상품만을 판매하는 코너를 담당하는 중국도매상을 거쳐 판매하고 있어 입점비 걱정은 덜었다”고 전했다.

  성 동문은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주요 중국관광지를 돌아다니며 직접 홍보와 판매에 나섰지만 지역 상표이다 보니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보해에 비해 인지도가 높은 다른 회사의 술을 더 많이 찾았다. 그래서 소주의 경우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방향으로 바꿨다. 중국 사람들에게는 지역 브랜드나 전국 브랜드나 똑같은 한국 소주였기 때문에 오히려 잘 팔렸다. 특히 한류열풍이 소주판매에도 한 몫을 했다. 중국 젊은이들이 한국드라마를 보고서는 한국 소주를 즐겨 마셨다.

  에는 ‘니하오’도 모른 채 중국에 건너와 고생을 많이 한 천오성 동문이지만 상하이에서도 전라도에 대한 애착만은 지켜나갔다. 천 동문은 “한국에 있을 때는 모임에 가입할 필요가 없었는데 해외에 나오니까 동문회나 향우회를 많이 찾게 되는 것 같다”며 “힘들 때마다 도움을 받으면서 동문들의 따뜻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시행착오 끝에 상하이 보해지사는 매출액이 5배정도 성장했고 안정적인 단계에 있다. 그래도 천오성 동문은 “아직 멀었다”고 이야기한다. 천 동문은 “중국 내에서 한국 술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질 수 있도록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지금 생활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삶 개척하길”

  천오성 동문은 대학시절 자신을 ‘공부 안하는 대학생’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만큼 공부에 대한 미련이 크게 남아있다. 그는 “공부는 기회가 있을 때 해야 한다”며 “환경이 어려워 취업하는데 어려움이 있겠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어 천 동문은 “전남 지역은 개발이 아직 덜 된 만큼 잠재된 능력이 많은 기회의 땅일 수 있다”며 “자부심을 가지라”고 덧붙였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개척 정신으로 중국에 건너온 천오성 동문은 그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새로운 땅에서 보해를 알리는 데 힘을 다하고 있고 자녀들도 국제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그래서 천 동문은 후배들에게도 “지금 생활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삶을 개척해나가길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천오성 동문은...
1981년 우리 대학 경영학과 입학
1987년 보해 입사
2001년~현재 상하이 보해지사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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