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학-푸단대학의 교류 활성화 위해 힘쓰겠다

중국인들과 막힘없이 대화하고 상하이 곳곳을 소개하는 박영석 동문에게서는 중국살이에 대한 깊은 내공과 자신감이 느껴진다. 중국 사람들과 몸으로 부딪치고 중국 곳곳을 발로 뛴 끝에 얻은 결과다. 상해 동문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박 동문은 사업을 하느라 눈코뜰새 없이 바쁘면서도 우리 대학과 상해 동문회에 대한 애정만큼은 남다르다.

대학을 나와야 대접받던 시절

대학을 나오면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고 대접을 받을 수 있던 시절, 박영석 동문은 1979년 우리 대학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당시 우리 대학 수의학과에 입학했던 박 동문은 더 높은 목표를 위해 다시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서울로 향했다. 5·18민주화운동을 뉴스로만 전해들었던 박 동문은 “신체 검사를 받기 위해 집으로 내려왔는데 광주가 폐허가 되어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우리 대학과 박영석 동문과의 인연은 박영석 동문이 81년 우리 대학 문헌정보학과에 입학하면서 다시 이어지게 된다. 군부독재시기였던 당시 학생들의 민주화에 대한 갈망은 컸고 전국 대학 곳곳에서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던 때였기에 박 동문도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박영석 동문은 “그 당시 대학은 민주화 운동의 본산이기도 했지만 취직을 하기 위한 발판의 역할이기도 했다”며 “지금도 그렇지만 대학이 학문을 깊숙이 탐구하는 공간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98년, 중국과의 첫 만남

대학시절부터 직장생활을 5년 정도 한 후 스스로 사업을 하겠다는 목표를 가졌던 박 동문은 졸업 후 5년 동안 교보생명에서 근무하다가 뷔페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시작한 사업은 순탄치 만은 않았고 1년만에 정리하고 페인트 대리점으로 업종을 바꾸게 된다. 한 번의 실패를 겪은 뒤 선택한 페인트 대리점은 페인트 뿌리는 기계도 함께 팔면서 호황을 누렸다. 그러던 중 98년 IMF가 터졌고 당시 박 동문은 어느 일간지에서 자녀 1명을 낳았을 때 대학까지 가르치고 독립할 때까지의 양육비용이 1억 3천만원이라는 기사를 보고 한국에서는 돈을 벌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중국이었다. 그해 여름 박영석 동문은 중국, 상하이와 첫 대면을 했다. 상하이를 거쳐 항저우로 가 이리저리 둘러본 당시 중국의 모습은 우리나라 70년대 초반과 같았다. “시골 고향에 온 기분이 들어 좋았다”는 박 동문은 세계 시장을 자기 분야에서 재패를 하려면 중국이 좋겠다는 생각을 안고 한국으로 돌아와 중국진출을 결심했다. 박영석 동문은 “불과 9년전 인데 지금은 상전벽해가 되었다”며 “자고 일어나면 달라질 정도로 중국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전했다.

만만치 않은 중국생활, 우여곡절을 겪다

중국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과 자녀 양육을 위해 2001년 중국으로 건너간 박영석 동문은 중국에서도 페인트 뿌리는 기계를 팔려고 했으나 인력이 많은 중국에서는 시기 상조였고 지인의 권유로 ‘Clean World’라는 상표를 내걸고 정수기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박영석 동문은 중국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항저우에 있으면서 수저우나 상하이에 사는 한국인들을 상대로 정수기를 판매했다. 하지만 한국인들만을 상대로 사업을 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중국어의 필요성을 느낀 박영석 동문은 중국 사람들과 자주 만나면서 중국어를 배워나갔다. 처음에는 들리지 않던 말들이 한 마디씩 들렸고 오랜 노력끝에 중국인들과 대화할 수 있게 됐다. 중국에서의 사업은 박 동문이 생각했던 것처럼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발로 뛰어야했다. 우리나라에 비해 교통이 좋지 않던 터라 폐차 일보 직전의 버스를 타기도 했고 여름이면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2003년 가족들이 건너오기 전까지 먼저 중국에서 혼자 생활해야했던 박영석 동문은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특히 중국과 우리나라의 문화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도 많았다. 지금까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온 박 동문과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살아온 중국 사람들 간의 마찰은 피할 수 없었다. 고장난 전자제품의 수리와 같이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당연한 것도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중국에서의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박영석 동문은 “중국에서의 경력이 많지는 않지만 이제는 자신이 있다”며 “내가 쌓아온 경험들과 노하우가 있기 때문에 어디서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상하이 동문회, 상하이 속 전남대인들의 모임

외국에 나가서 같은 한국인을 만나면 유난히 반갑다. 박영석 동문은 아는 사람이 없던 상하이에서 사업을 하면서 우리 대학 동문들을 만났고 2005년 4월 몇몇 동문들과 뜻을 합쳐 상하이 동문회를 설립했다. 그 해 10월에는 푸단대학 1백 주년 기념식을 맞아 상해에 방문한 총장님 내외와 교수님들을 상하이동문회에서 안내했다. 현재 상하이 동문회의 인원은 30명 정도로 박 동문은 설립때부터 지금까지 회장일을 맡아 오고 있다. “상하이저널과 같은 상해 교민신문에 동문회 모집광고를 내고 있다”는 박영석 동문은 우리 대학과 푸단대학 간의 교류 활성화를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 중에 있다. 박 동문은 “푸단대학 내에 문화공간을 마련해 인적교류나 학술교류를 맺고 한국전통음식이나 차를 팔면서 한국의 음식문화를 중국학생들에게 알릴 예정”이라고 전했다. “특히 우리 대학을 중국학생들에게 소개하는 데 힘쓰겠다”는 박영석 동문은 중국에 있는 우리 대학 동문회들 간의 인적 교류를 통해서 동문들이 중국에 진출하는데 길잡이 역할도 함께할 계획을 갖고 있다. “상하이 동문회가 양 대학 학생들이 교류할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박 동문에게서 우리 대학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공부·사랑·여행 “다 해 보라”

박영석 동문은 “우리 대학에 훌륭한 학생들이 많은데 졸업하면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는게 안타깝다”며 “우리 대학은 호남 제일의 명문대학에 다닌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공부하라”고 당부한다. 박 동문은 자신이 중국에서 몸으로 부딪치고 발로 뛰면서 고생을 했지만 그런 경험을 통해 배움을 얻었기에 학생들에게도 다양한 경험을 해볼 것을 강조한다. “학창시절 공부도 열심히 하고 사랑도 해보고 방학이면 외국 배낭여행도 다녀보라”는 박영석 동문은 “다양한 경험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 화 기자 cookka@hanmail.net



박영석 동문은
1981년 우리 대학 문헌정보학과 입학
1988년 우리 대학 문헌정보학과 졸업, 교보생명 입사
1993년 지산 실업 창립
2001년 중국으로 건너감
2005년 우리 대학 상해 동문회 회장으로 선출됨
2007년 상해에서 ‘Clean World’ 정수기 사업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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