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것이 아주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 내게 그들이 던진 답변은 “괜찮아요. 이 정도는 참을 만 해요. 처음엔 많이 불편했는데 지금은 익숙해 졌어요”였다.
아마 나는 내가 장애 체험을 했던 그 때를 떠올렸나보다. 고등학교 때 두 명 씩 짝을 지어서 시각 장애 체험을 한 적이 있다. 눈을 꼭꼭 가리고 친구 손을 꽉 잡고 정해진 목적지 까지 가봤다. 작년에는 눈을 가린 후에 파트너의 설명으로만 동그란 원형 미로를 종이 위에 그리는 체험을 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세상에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 너무 불편하고 불안했고, 실제로 내가 그렇게 된다면 정말 끔찍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내가 취재한 그들은 이미 불편한 세상에 불편한 몸으로 적응을 해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내가 ‘혹시 이것은 불편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어봐야 그때서야 ‘아, 그거 진짜 불편해요’라고 답하곤 했다.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기획협력처장님의 말처럼 우리는 어쩌면 당연한 그들의 권리를 지켜준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들에게 혜택을 준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의 권리를 지켜준다는 생각대로라면 ‘장애인 도우미’도 필요 없다. 그저 그들을 몸이 약간 불편한 친구로 생각하고 도와주면 된다. 어쩌면 그들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우리가 장애인일지도 모른다. 마음의 장애를 가진 마음 장애인. 장애 학생 취재를 하고 나서야 장애 학생들 한 둘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나처럼 우리 대학 학생들도 그들을 특별한 시선 대신 따뜻한 시선으로 관심을 갖고 바라봤으면 좋겠다.
취재 끝자락에 “이럴 때만 전화하는 당신 같은 사람이 제일 싫다”던 장애 학생 학부모의 당부가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장애인의 날이 있는 4월을 제일 싫어합니다. 언제나 같은 요구를 하고 소리 내는데 왜 이럴 때만 우리에게 관심을 갖는지 모르겠어요. 평소에도 친구끼리 의형제 맺고, 의남매 맺듯이 장애 학생과도 의형제, 의남매 맺을 수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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