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런 전남대인을 찾아 - 아시아 편 <3>    일본서 광고대행사 운영 김재호 동문 ( 정치외교·82학번)

김재호동문을 찾아 가는 길은 어렵고 험난했다. 하지만 힘들었던 것도 잠시 김재호 동문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더위는 금방 물러나고 동문의 환한 웃음이 사무실을 밝혀 주었다. “일본의 다양한 직업군을 경험하는 것이 목표였다”는 김 동문은 자신의 목표대로 한국 위성 방송사 설립, 여행사 등을 운영했으며 지금도 부동산, TV저작권 관련 일, 광고 대행사, 한국 연예잡지사 일을 하고 있다.

▲ 지난 여름방학 일본을 찾은 전대신문방송사 기자들과 대담을 나누고 있는 김재호 동문

일본 경제력에 놀라 일본어 공부

김재호 동문은 어렸을 때부터 정치활동이나 사회가 움직이는 원리에 대해 유난히 궁금증이 많았다. “정치 행태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흥미로워 정치외교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학교를 졸업한 후 88년에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을 1년가량 했다. 당시 88올림픽으로 외국인이 우리나라를 오갔을 때 유난히 일본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고 한다. 김 동문은 “88올림픽을 개최하고 있을 때 가장 많은 기사가 나왔던 나라가 일본이었다”며 “그때 일본 도쿄 땅을 팔면 미국과 캐나다 전체를 살 수 있을 정도로 일본이 전 세계를 삼킬 듯한 경제력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2년 정도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어 전공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일본에 대한 다양한 기사 중에서도 김 동문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직업군에 관한 이야기였다. 김 동문은 “그 당시 한국의 직업군은 5천개 정도였고 일본의 직업군은 2만개였다”며 “이 다양한 직업군을 경험해 보는 것이 내 목표였다”고 전했다.

실패가 나를 키워

이후 90년에 일본으로 가게 됐다. 김재호 동문은 2년만 있으면 일본어를 쉽게 배울 수 있다는 말에 일본행의 결정을 내렸다. “외국어가 된다고 해도 고작 2년의 경험으로 일본 사회에 적응하기는 힘든 일 이었다”고 말했다. 김 동문은 일본에 단돈 11만 엔을 들고 일본인이 쌀을 먹는지 빵을 먹는지도 모르고 건너갔다. 처음에 장사를 시작해 돈을 조금씩 모았고 이후 친구의 아이템으로 한국위성 방송사를 설립했다.

김 동문은 “그 당시 일본에서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이 한국 방송을 보려면, 비디오 대여점을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며 “아이템은 좋았지만 환경 여건과 경영악재 등 여러 가지 한계에 봉착하면서 한참 빚에 쪼들리게 됐다”고 그 간 고생을 말했다. 김 동문은 “그때 함께 운영하던 여행사도 방송국 빚으로 넘어가게 됐다”며 “하지만 이 한 번의 실패가 나를 더 끈질기고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말했다. 김 동문은 “지금 운영하는 부동산 회사를 어떻게든 살려 운영을 하다 보니 다시 돈을 모을 수 있었고, 지금 아내가 운영하는 식당도 차릴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지금은 부동산과 TV 저작권 관련 일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광고 대행사와 한국 연예잡지 편집장을 맡고 있다. 또 ‘옥타 한민회’ 총무이사를 맡고 있다. ‘왜 이렇게 직업이 많나’는 질문에 김 동문은 “일본의 수많은 직업군을 경험해 보는 것이 내 목표 중 하나 아니겠는가”하고 웃었다.

대학 시절엔 데모와 술로 보내

대학 때의 추억을 묻자 김재호 동문은 “우리 세대가 대학교를 다닐 때는 굉장히 암울한 시기 였다”며 “데모와 술이 대학 생활의 주 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그 당시 전두환 정권에 데모를 많이 했으며, 1학년 때 전 학생회장 박관현 씨가 옥사했다는 것이 크게 기억에 남는다”며 “법대, 상대, 인문대 세 개 대학이 데모를 주도하여 집단 시험 거부로 한 과목이 낙제를 받았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나마 교수님들이 시험을 다시 보게 해서 점수를 다시 받긴 했지만 박 열사의 죽음은 정말 안타까웠다”고 전했다. 김 동문은 “나는 비교적으로 데모를 적게 한 사람으로, CCC에 들어가 선교사 활동과 기타를 쳤었다”며 “하지만 생각보다 많이 논 것 같지는 않다”며 웃었다.

김재호 동문은 우리 대학 학생들에게 “부모님께서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며 “단체를 소중히 여기셔서 연대와 책임을 강조하셨다”고 말했다. 김 동문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로에게 주지도 받지도 않는 개인주의 사회가 오더라도 이러한 마음은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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