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위조. 이 네 글자를 보자마자 신문을 덮어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이 물씬 일어 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이번에는 초점을 조금 달리하여 이야기해보자는 궁색한 변명을 핑계 삼아 먼저 양해를 구해본다.

일면식도 없는 두 사람이 한국사회 안에서 만났다. 무엇을 할까? 악수를 하거나 목례를 간단히 하고 즉시 서로의 이름, 나이, 출신 지역과 학교를 물으며 상대방을 파악할 것이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개인들은 이처럼 학연과 지연을 통해 서로를 끌어당기며 복잡한 인맥을 형성해 간다.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중추적인 얼개가 학연과 지연이라면 학력위조야 말로 가장 탄로 나기 쉬운 거짓말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이 좁은 나라에서, 그것도 그들이 속한 ‘손바닥’만한 직업세계와 학문세계 안에서 학력을 속이려 했던 것일까? 이런 단순한 질문을 던져가다 보면 이번 사태가 지닌 문제를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학력위조라는 무모한 행위가 사회 속에서 버젓이 뿌리 내리고 싹을 틔워 꽃을 피우고 열매까지 맺게 했던 우리 사회의 비릿한 토양을 점검해보아야 할 시점인 것이다.

‘털어서 먼지 않나오는 사람이 어디 있냐?’라는 말이 진리인 양 받아들여져 왔다는 사실이야 말로 이 비릿함을 대변해 주는 단적인 표현일 것이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갖은 책략과 수단을 동원해도 좋다는, ‘하면 된다. 안되면 되게 하라’식의 거침없는 사고가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기에 대체 어느 정도에다 비난의 선을 그어야 할지에 대한 판단력이 이미 흐릿해진지 오래가 아니던가.

 없던 쌍꺼풀이 생기고 낮았던 코가 높아지며 그로 인해 연예인들의 몸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현실은, 없던 학력을 만들고 있었던 학력을 부풀리는 행위와 묘하게 닮아 있으며, 이는 부재하던 줄기세포가 존재케 되고 그 수가 늘어나 흡사 마술쇼를 보는 듯 한 착각을 가져다주던 과거 어느 때를 추억하게 만든다. 어찌 보면 그동안 먼지로 뽀얗게 덮여 있는 타인의 삶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자위했던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번 ‘학력위조활극’의 등장인물로서 일조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 사태를 통해 대학(원)의 입학전형에는 입학요건보다 더 까다로운 졸업요건 특히 지역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 속에 있는 ‘덜 배울 수밖에 없는’ 이들에 대한 의무조건이 ‘더 배움’에 대한 자경(自警)의 메시지로서 명시되길 바란다. A4 한 장짜리 학위기로서가 아닌, 과잉 축적된 지식을 조금이나마 나누고자 일평생 두고두고 발버둥치는 과정으로서 학력이 증명되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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