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의 광주를 붉게 물들였던 그 날의 작전명 ‘화려한 휴가’. 이 아이러니한 단어가 27년의 어둠 속에서 한 편의 영화로 되살아났다. 부활한 화려한 휴가는 모든 시민들의 마음에 그 날의 광주시민이 겪었던 슬픔과 아픔을 심어주면서 좋은 흥행성적을 거두고 있다.

나는 광주헌정시사회에 가서 보았다. 감독이 ‘이 영화를 광주시민들게 바칩니다’라는 말을 했을 때의 그 뜨거워지는 가슴. 나는 순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바라보는 열정적인 크리스천이라도 된 냥 영화의 시작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화려한 휴가는 히어로즘을 배척하고 객관적인 리얼리즘을 추구한 영화였다. 즉 영웅적인 주인공에 포커스를 집중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포커스를 집중했다. 이는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인물들에 대해 감정적으로 몰입을 하기 보다는 제 3자의 입장에서 냉철하게 5·18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그 평범했던 인물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였고, 그 변화의 이유는 5·18이라는 상황임을 감독이 의도한 듯 하다.

이러한 의도는 나에게 큰 메리트를 주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야기보다는 평범한 택시운전사가, 간호사가, 청년이, 학생의 삶이 얼마나 치열하게 바뀌었는가에 대해서 필자는 눈물을 흘리며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이 조용히 흘러나오는 가운데서 만감이 교차했다.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분노와 그 날의 광주시민들이 겪어야했을 아픔과 슬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생각으로 뭉쳤다. 27년의 어둠 속에서 5·18은 말을 할 수 없는 금기시되는 단어였다. 비록 군부독재가 끝나고 문민정부, 국민정부, 참여정부에 이르기 까지 많은 민주화세력이 정권을 잡았지만 5·18은 금기시 되어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5·18이 김 지훈이라는 감독에 의해 세상에 나타난 것에 대한 그 감동은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런 감동에서였을까? 아니면 광주시민이라는 자부심에서였을까? 영화관을 나서면서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신 닦아내었다. 그것은 광주시민임에도 불구하고 5·18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눈 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가운데 나는 속으로 조용히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화려한 휴가’속에서 다시 부활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버렸던, 영웅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했던 그 날의 광주시민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필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끊임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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