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강신청을 하러 학생들이 학과 사무실을 다녀간다. 학점을 받기 쉬운 과목에 학생들은 우르르 몰려든다고 한다. 립스틱 색깔 같은 배롱나무 꽃(백일홍)을 창문너머로 바라보며, ‘나는 학점을 잘 주는 교수일까’라고 자문해 본다. 대답은 ‘A+도 많이 주지만 F도 가차없이 때린다’. 그래서인지 학기가 끝나면 F 학점을 올려달라고 학생들이 찾아온다. 15년 남짓 교수생활을 하면서 그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학생이 한 명 있다.

그 여학생은 키가 좀 작고 단정한 옷차림에 머리를 뒤로 묶었다. 머뭇거리며 연구실에 들어와서 출석과 과제, 시험점수를 확인했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F 학점만 면하게 해주세요. 안 되는 줄 알지만 D만 주시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거든요.” 나는 당연히 안 된다고 말했다. 이미 중간고사 점수를 공개하면서 한 차례 경고를 했고 여러 번의 결석과 과제 미제출, 그리고 낮은 기말고사 점수를 들었다.

학생은 소파에 앉더니 이내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모른 척 책상 위의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컴퓨터로 눈을 돌렸다. 한참 후, 힐끗 넘겨보니,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하얀 살결의 뺨 위로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고 난감했다. 얼마 뒤 학생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여자가 울면 나는 항상 곤혹스러웠다. 여학생들과 누이와 아내의 눈물, 심지어 어머니의 눈물도. 어떤 행동을 해야 할 지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지 몰랐다. 대부분 아직 그럴 때가 아닌데 앞당겨 눈부터 빨개지는 그네들의 감정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저 답답하게 바라보다가 마침내는 화가 치밀어 오르곤 했다. 눈물이 무슨 무기라도 된단 말인가.

울음을 그치지 않는 학생을 놔두고 잠시 연구실을 나왔다. 할 일없이 학과 사무실에 가서 우편함을 뒤적이고 조교와 잡답하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왔다. 그 때까지도 그녀는 흑흑거리고 있었다. 나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왜 이 학생에게 눈물을 흘리게 해야 하는지, 가슴이 미어져 왔다.

 “학생, 이제 그만 울어요. 내년에 재수강하면 되잖아요. 응!”

그러자 그녀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무슨 서러움이 북받쳐 오르는 사람처럼. 그리고 점점 소리가 커지더니 거의 통곡에 가깝게 울어댔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내가 그녀 옆에 앉아 등을 토닥거리며 한참을 달랬더니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울음을 그치지는 않았다.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어서 내 자리로 돌아와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 십분은 더 흘렀을 것이다. 소리가 점점 잦아들다가 그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눈물 콧물을 다 닦아내고 나서 조용히 일어섰다. 나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서는 말없이 연구실을 나섰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녀는 그리도 서글프게 울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교수 연구실에 찾아와서 눈물을 짜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워서 흐느낌을 그치지 못하다가, 갑자기 이제껏 살아온 자신의 고단한 삶에 대해 너무 서러운 생각이 들어서 그냥 목을 놓아 버린 것은 아닐까. 그녀가 나간 뒤, 나는 잠시 고민했다. 학점을 올릴까 말까 하고. 그러나 올리지 못했다. 다만 가슴이 얼얼했다.

수업 첫 시간에, 대학 학점이란 성실도 측정이라고 나는 말하곤 한다. 그 과목을 듣는 학생의 실력이 월등히 뛰어나서 A를 따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 과목에 성실했기 때문이라고. F를 받은 학생은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성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도 대학 1학년 1학기 때 생물학에 F를 받아 학사경고를 받았지만 2학기에는 성적우수자가 되었을 정도로 학점은 맘먹기에 달렸다고. 학점이란 그 과목을 마치면서 얻게 되는 지식의 성취도가 아니라 수강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학생의 성실한 노력의 모습이라고. F 학점은 재수강을 받아서 회복할 수 있지만 젊은 날에 흘러 보낸 불성실한 한 학기는 되돌릴 수 없다고. (그 여학생은 다음 학기부터 좋은 학점을 땄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자문한다. 학생들이 나의 강의에 대해 학점을 매긴다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내가 살아온 삶을 누군가 평가한다면 어떤 학점을 받게 될까? 재수강을 받을 수 없는 생을 나는 과연 성실하게 살고 있는가? 선홍빛으로 번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다가 지난날에 대한 회한 때문에 가슴 속으로 통곡했던, 그 때의 그 사람은 정작 나 아니고 누구였던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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