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오월이 사그라지고 있다. ‘오월의 그날’이 달력의 뒷장으로 또 한 번 넘어간다는 사실로 인해 석별의 정에 가슴시리기 보다는 길고 가냘픈 ‘선방’의 한숨을 쉬는 사람이 더러 있을 법도 하다. 광주에서의 오월 나기는, 특히 용봉골에서의 오월나기는 ‘기억하기’를 향한 강렬한 양심적 손짓과 ‘망각하기’로 무심히 뻗어나가는 세월의 촉수 사이에서 애매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역사가 이어지는 한, 광주는 오월을 맞이할 것일 터. 그때마다 우리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지치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 가능이나 한 것일까? 이런저런 고민 끝에 올 오월에는 ‘그날’의 날씨를 되짚어 보면서 말문을 열어보기로 했다. 이런 뜬금없는 방식을 통해서라도 기억하기의 맥이 사그라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다면 잠시 눈 좀 감아줄 수 있는 것 아닌가,하고 겸연쩍게 양해를 구해본다.
 

각설하고, 기상청 데이터베이스에서 길어 올린 1980년 5월 18일, 광주지역의 날씨는 다음과 같았다. 날씨: 햇무리, 최고기온: 25.1도, 최저기온: 6.8도, 상대습도: 58.3% 살포시 걸린 햇무리 덕에 그리 덥지 않은 전형적인 봄날. 무등의 신록은 시대의 겨울로 인해 움츠린 마음씨들 마냥 깊이 패여 있던 산골짜기의 어두운 그늘을 푸르게 회복시키느라 한창이었다. 무등을 마주바라는 용봉골은 태양 빛을 반사하는 달처럼 무등의 생명력과 회복의 기운을 배움의 둥지 이곳저곳의 신록으로 되 뿜어내고 있었으리라.
 

‘민주주의의 성지’라는 거창한 수식어로 용봉골을 화려하게 치장하기에 앞서 과연 그날의 사람들이 어떤 대지 위에서, 어떤 공기를 마시며 살았는지를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절대적 침묵의 장막을 맨손으로 헤집고 나오면서 민주주의의 양수를 터트린 아기장수들은 대체 어떤 어머니된 자연을 두었던 것인지, 대체 이 남녘과 이 용봉골이 어떠했기에 오월의 사람됨을 만들어 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독재니, 긴급조치니 하는 매캐한 입자들이 대기에 뿌려지기는 것을 간과하기엔 이곳의 공기는 너무도 투명한 것이었고, 서울의 봄을 일장춘몽이 주는 나른한 따스함으로 가벼이 넘기기에는 남녘의 봄은 잔인하리만치 푸른 것이었다. 피할 수 없는 역사의 질곡이라며 눈 질끈 감고 그늘 속에 무력히 앉아 세월이나 낚는 강태공이 될라치면 양심의 어두움과 그늘을 철저히 해체시켜버리는 이 땅의 따가운 햇살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 공기, 그 푸르름, 그 햇살에 뿌리내리고 숨 쉬고 있던 인생들이었기에 거리로, 총칼로 뒤덮인 거리로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오월의 사람됨을 만들어낸 그날의 흔적이라도 찾아보고 싶어 오늘의 용봉골을 거닐어 본다. 안타깝게도 오월의 사람들이 밟았을 건강한 토양과 맑은 공기, 가릴 것 없는 태양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떠나보는 발걸음은 이내 탁한 봄날의 대기를 전경삼고 무표정한 아스팔트 길을 이웃삼아 여기저기 높이 들어서고 있는 쓸쓸한 건물들만을 맞이한 채 번번히 서글프게 마무리 되고 만다.
 

올해 5월에도 용봉골에서는 오월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몸짓들이 오고갔다. 이 ‘대화’와 ‘행사’들을 통해 오월은 온전히 부활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차갑게 냉동되어 최소한 부패나마 방지된 채로 우리 곁에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만일, 오월이 차갑게 박제됨을 넘어서 다시 생명력을 얻게 되기를 꿈꾼다면 용봉골의 오월은 ‘그날’에게 강인한 생명을 주었던 용봉골 대지, ‘오월 어머니’를 되살리기 위한 작전회의로 둥지 이곳저곳이 들썩거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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