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 선배에게 항상 듣던 말 중 하나가 “공부 좀 해라”는 말이었다. ‘보다 많은 지식을 쌓고 보다 많은 정보를 알아라’는 말이다. ‘많이 안다’라는 말은 인간의 지배 역사와 그 맥을 같이 하기도 한다. 자연의 법칙에 대한 탐구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를 낳았고 현대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나라, 기업, 사람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면보다 ‘많이 안다’라는 것은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분의 말처럼 ‘모두가 참된 방식으로 만나기 위해, 타자와 만나기 위해서’이며 ‘옳음을 추구하기 위해서’ 이다.

신문을 만들면서도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것이 ‘아는 것의 문제’이다. 기자가 얼마나 많은 정보와 배경 지식을 가지고 그에 따르는 현명한 판단을 내리느냐에 따라 기사의 가치가 달라진다. 신문에 대한 인식을 알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면 항상 나오는 말 중 하나가 ‘총학생회 편만 든다’, ‘친 본부 적이다’이다. 학생회, 본부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다만 어떠한 소리를 듣던 간에 기자는 충분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자신의 기사에 책임을 질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독자는 기사를 신뢰하고 신문은 독자와 참다운 소통을 할 수 있다.

 

이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에서도 해당된다. 우리네 인간사에 비방과 비난이 난무하는 것도 알기보다는 모르는데 이유가 있다. 임의진 목사는 “한국 사람들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면 ‘그건 아니다’로부터 대화를 이어 나간다”고 했다. 꼭 그렇게 말해야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것처럼. 한 두 마디의 오고감으로는 그 사람을 알 수 없을 텐데 우리는 너무 급하게 대화를 단절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분명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일테다.

 

어떤 사람 중에는 신문에 바라는 점으로 ‘총학기사는 재미없으니 안 썼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은 ‘정치는 재미없으니 신문에 정치 기사는 안 썼으면 좋겠다’는 말과 같다. 재미가 없다는 것은 관심이 없다는 것이고 관심이 없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다. 이는 한 쪽은 보지 못하는 반쪽짜리 삶이 될지도 모른다. 보다 많이 안다는 것은 하나의 완성품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기자는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닌 옳은 사회(완성품)를 위한 비판을, 우리의 관계는 1회성 만남이 아닌 끈끈한 신뢰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며 사회의 부조리에 더 크게 소리 칠 수 있을 것이다. 창간 53주년을 맞아 여전히 다짐해야 할 것은 ‘열심히 공부하자’이다. 보다 더 많이 알기 위해. 독자와 더 잘 소통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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