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5시쯤 전대사거리에서 518번 버스를 타고 30분 망월동 국립518묘역에서 내렸다. 차가운 바람이 살갗을 맞댄다. 두어 시간 전만해도 뜨거운 태양이 내리 쬐었는데. 518묘역은 서늘했다. 그 서늘함에 내 몸 스스로 숙연함을 느꼈다.

518묘역은 작년보다 더 깔끔해 보였고, 큼지막한 전시관도 새로 생겼다. 전과 다름없이 분수도 하늘과 세차게 부딪혔다. 그렇다고 으리으리하고 멋진 조형물들이, 하늘로 치솟는 분수가 내게 감동을 주지는 않았다.

탑 아래서 분향을 하고 묵념을 했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러고선 먼저 가신 이들의 무덤을 둘러보았다. 묘지에 새겨진 이름과 그들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이 순간만큼은 가신 이들을 잠시나마 마음속에 담아두자고 했나보다.

얼마 있지 않아 귀에 익지 않은 억양이 들렸다. 흰 티셔츠에 이름표를 단,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 앞에 무리지어 있었고, 그 중 한사람이 설명을 했다. 가까이서 들어보니 이 곳에 묻히신 분들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돌아가셨으며 어떤 말을 남겼는지를 한 여학생이 들려주고 있었다. 그 여학생 또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고, 책을 펼쳐가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아무 말 않고 조용히 가이드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약간 침울한 듯 하면서도, 의연한 듯했다.

명찰에는 ‘경북대학교 역사기행단’ 이라고 써져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무덤 하나하나를 허투루 넘기지 않고 먼저 가신이의 자취를 더듬었다.

무덤을 다 둘러 본 듯한 남학생들 무리에 끼어들어 잠시인사를 하고 다짜고짜 어떤 동기로 망월동에 왔는지를 물었다. 짐작은 갔지만 내 귀로 그들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사실 처음에 멀리서 보았을 때는 518 자원 봉사자들이 학생들을 상대로 설명하는구나 해서 그냥 지나치려했다. 요즘 자원봉사자를 많이 뽑더니, 가이드가 열심히 잘한다 싶었는데 가까이서 들리는 망월동에서의 경상도 사투리가 왠지 낯설었고 관심이 간 것이다.

우연히 처음 학생이 경북대총학생회장 박재진 군이었다. 박 군은 대구에서 광주에 올 기회는 좀처럼 없어 광주의 5월에 대해 제대로 알 기회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80년 5월을 눈으로 보고 느끼기 위해 역사기행단을 통해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그의 말로는 경북대 총학생회가 2005년부터 역사기행단을 꾸려서 광주에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성우원 군에게 518묘역에 온 감회랄까를 물었다. 성 군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관심은 있었지만 교과서에서는 잠깐 언급만 되었고, 인터넷을 뒤저도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518묘역 사진전시실에 걸린 군화발에 치이고 학생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적나라한 사진을 보면서 어쩜 이런 일 있을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을 했고, 스스로 몸서리 쳤다고 한다. 제 나라사람이 제나라사람을 죽이는 말도안돼는 이 안타까운 일이 어디있냐? 면서.

광주에서 나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의 부모는 광주에 대한 기억이 없다. 하지만 이 땅에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든 광주의 5월을 알고자 찾아온 경북대학생들이 같은 대학생으로서 고개가 숙여질 정도였다.

그러면서 나는 경상도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알려고 노력은 해봤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지역의 일만 조금 알고 있으면 다인 양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왜 좁게만 바라보고 크게 생각하지 못하는가. 광주에서 대학을 다니는 한 사람으로서 내 자신에 대해 자책을 했다.

저 80여명의 경상도 아그들의 가슴속엔 어느새 광주의 5월이 가득 담겨있었다. 붉게 물든 망월동 하늘아래서 한없이 커 보이는 그들은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그들은 가슴에 광주의 기억을 새기고 있었다. 이러한 대학생들이 있는 한 잘못된 역사는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흰색티셔츠 뒷면에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기억하지 못한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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