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 따위로 혼잡하고 어지러운 상태에 빠진 것’을 가리키는 아수라장이라는 말은 인도 신화에 나오는 ‘아수라’신에서 연유한다. ‘아수라’는 원래 정의의 신이었으나 후에 악마의 신으로 전락한 불행한 존재이다. ‘아수라’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어느 날 힘의 신인 ‘인드라’가 그녀를 납치해 아내로 삼아버린다. 정의의 신인 ‘아수라’는 ‘인드라’가 저지른 불의를 용납할 수 없었다. ‘아수라’는 즉각 정의를 실천하기 위하여 힘으로는 도저히 이기기 어려운 상대인 ‘인드라’와의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싸움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지만 ‘아수라’의 정의를 추구하는 집념과 명분에는 관용이 끼어들 여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패하고 또 패하면서도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정의의 집념은 점차 죽음, 고통, 분노, 증오의 늪 속에 매몰되어갔고, 결국 정의의 신인 ‘아수라’는 악마의 신으로 전락하여 지옥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으로 떨어지고 만다. ‘아수라’가 있는 지옥에는 싸움이 계속되어 그곳 역시 아수라장을 이룬 곳으로 묘사된다. 만일 ‘아수라’가 ‘인드라’에게 정의의 참뜻을 깨우치게 하는 방법은 ‘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수라’는 오늘에도 정의의 신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아수라의 신화는 불가에서 정의의 실현과 관용의 관계를 성찰적으로 짚어보게 하는 일화로 인용된다고 들었다.
 

5월을 맞아 정의와 관용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작은 사건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많은 신문이 엊그제 보도한 소위 ‘전두환 나무가 죽어가고 있다’는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신문의 기사는 가끔 부정확할 수 도 있기에 보도 내용이 사실 그대로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신문의 기사를 그대로 옮겨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임기 말인 지난 1987년 광주시청을 방문해 심었던 이 나무는 17년 동안 옛 계림동 청사에 있다가 2004년 시청 청사가 치평동으로 옮겨오면서 식수 동산으로 이식됐다.

 

시는 이식 당시 5·18 단체 등의 거센 반발과 시민들의 정서를 감안, ‘전두환 대통령 기념식수’라는 표지석을 없애고 다른 20여 그루의 나무와 섞어 심었다. 그러나 이 나무는 이전 3년째인 올해 초부터 사철 푸른 이파리들이 하나둘 떨어지더니 이제는 아예 말라죽기 직전이다. 이는 경남 합천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호를 딴 ‘일해 공원’ 조성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분노한 5월 관련 단체 회원들의 해코지 때문이다. 일부 5월 단체 회원들은 처벌을 각오한 채 수차례에 걸쳐 동백나무 줄기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제초제를 집어넣는가 하면 밑동에 불을 피우고, 일부 가지를 톱으로 자르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해 괴롭혔다.”
 

표지석을 없애고 여러 나무와 섞어 이식했기에 기념식수로서의 기능이 사라진 나무를 일부러 찾아서 죽이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느끼고 배울 것인가? 하나의 생명을 그렇게 앗아가는 행동에 슬퍼지는 마음이 앞선다. 오월의 아픔을 승화시켜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이끌어냄으로 아시아의 민중에게 희망을 주자는 목소리가 광주에 퍼져왔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제 다시 오월을 맞아 광주에서는 5·18 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몇 주 동안 펼쳐질 것이다. 그러한 행사에서 5·18 의 진정한 정신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되새겨지기를 바란다. 겉치레 형식보다는 정신과 내용이, 갈등보다는 상생이, 그리고 투쟁보다는 관용이 자리 잡아 궁극적으로 5·18 정신을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로 연계시키는 일련의 작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기에 신동엽시인이 4·19의 참뜻을 쫓아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듯이, 나도 그 말을 하고 싶다. 오월도 참된 정신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이제 제발 껍데기는 가라.

최 협(인류학과 교수·문화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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