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학과 54학번  안성례 5월어머니회 회장<br>간호사로 5·18참상 생생히 목격…5월 정신 안고 시대 문제 고민해보길

1980년 5월 18일. 우리나라에서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될 민주화 운동이 우리 대학 정문을 시작으로 해서 일어난다. 그 민주화를 향한 강한 외침의 현장에 한 부부가 있었다. 남편은 우리 대학 교수로서 학생들과 함께 거리로 나가 시위에 앞장섰고 아내는 간호사로서 무고한 부상자들을 돌보는 데 힘을 쏟았다. 바로 故명노근 교수와 안성례 동문 부부다. 안성례 동문은 5.18 민주화운동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그 진실을 전하기 위해 현재 ‘5월어머니회’ 회원들과 함께 ‘5월 어머니집’을 운영하고 있다.

나이팅게일과 미국유학 꿈꾸다

6·25전쟁이 막 끝난 후 먹고 살기에도 힘들었던 54년, 여성이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여성교육에 대한 인식이 어느 때보다 부족했던 그 때, 안성례 동문은 미국 유학을 꿈꾸며 우리 대학 간호학과에 입학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유학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좋은 직업이 간호사라고 생각했다”는 안 동문은 학창시절 수술실에서 실습을 하며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당시 우리 대학에서 국비 유급 조교로 일하던 명노근 교수를 만나 22세의 젊은 나이에 결혼했다. 결혼 이후 불어 닥친 4·19혁명, 5·16 군사정변 등 혼란스러운 시대상황과 국가 권력의 위협 속에서 안 동문의 꿈은 묻혀버리고 만다. 안성례 동문은 “소박한 나이팅게일의 꿈을 꾸었던 단순한 사람이 1980년 5.18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민주화를 위한 투사가 되었다”고 전했다.


5·18 현장에서 간호감독으로 활동

1980년 5월 18일 광주시민들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 일상적인 삶속에 느닷없는 총성과 함께 군부들이 쳐들어왔다. 안성례 동문은 “이유도 없이, 장 보러 나갔다가 당하고, 고향 찾으러 왔다가 당하고, 책 사러 갔다가 당하고 아무런 죄가 없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고 당시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 당시 광주기독병원에서 간호 감독을 하던 안 동문은 응급실에서 여러 환자들의 치료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검사하는 역할을 했다. 5·18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부상자들의 참상의 현장을 그대로 지켜봤다는 그는 “내 나라 군인들이 내 민족을 어떻게 이리 잔인하게 대할 수 있는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고 울분을 토했다. 급속도로 늘어나는 부상자들을 치료하기에는 피가 부족했고 안성례 동문은 병원 직원들과 시민들에게 헌혈을 부탁했다. 헌혈 방송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상자들을 살리겠다는 의지로 시민들은 너도나도 병원으로 달려와 헌혈을 했다. 광주기독병원은 선교사가 세운 병원이었기 때문에 외신기자들과 소통할 수 있었고 외신기자들이 5·18민주화운동을 국제 엠네스티에 알렸다. 안 동문은 환자들을 옮기려는 군부와 맞서 싸우면서 환자 치료에 힘썼다. 안성례 동문은 “지금 같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인데 분노가 힘이 되어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학생들과 민주화 외친 명노근 교수

안성례 동문의 남편인 故명노근 교수는 당시 민주화운동의 진원지인 우리 대학의 교수로서 독재정권에 저항했고 학생들과 끝까지 함께 민주화를 외쳤다. 5·18민주화 운동 수습위원이었던 명 교수는 시민들의 석방을 요구했고, 기독교 방송에 독재에 항거하는 칼럼을 게재하기도 했다. 그는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상무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서도 흐트러짐이 없이 군부에 굴복하지 않았다. 78년 국민교육헌장에 반대하는 교육지표 사건에 의해 해직당했던 명노근 교수는 84년 복직한 이후에도 YMCA활동과 더불어 5.18민주화운동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기까지 사회활동과 민주화를 위해 힘썼다. 지난해에는 명노근 선생 기념사업회가 생겨 그 정신을 계승해오고 있다.
 

안성례 동문은 “명 교수는 가족이든 나라든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혼을 불어 넣는 지고지순한 순애보였다”며 “옳고 그른 것은 명백히 구분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고 전했다. 안 동문은 “학문적으로 큰 업적은 남기진 못했지만 몸으로 직접 실천하면서 최선을 다했던 교수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힘들다는 말 한 마디에 ‘그게 무슨 고생이냐’고 호통쳤다는 명노근 교수에게 한 번쯤 불평했었을 법도 한데 “정말 떳떳하고 곧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안성례 동문에게서 남편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느껴졌다.

최초 지방여성의원, 초석 다지다

민주화투쟁 이외에도 병원에서 간호사로서 헌신하려 했던 안 동문은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시민후보로 나가 최초 지방 여성의원이 된다. 그는 광주 시의원으로 7개 동을 관리하면서 각종 민원과 빈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활동했다. 안성례 동문은 “원래 정치에 뜻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여성의원으로서 초석을 다지기 위해 각 지역에서 여성의원의 역할에 대한 강연을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안 동문은 이와 함께 5·18민주화운동 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밝혔다.

5월 아픔 나누는 ‘5월 어머니집’열다

5·18민주화운동을 전후로 많은 사람들이 구속된다. 민주화 관련 인사들이 도리어 폭도 취급을 받게 되면서 그들을 지켜내기 위한 가족들의 힘이 커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구속자 가족 운동이 일어났고 86년 민주화 실천 가족운동 협의회가 생겨나 97년까지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드러내는 크고 작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5월 어머니회’의 뿌리는 바로 이 구속자 가족모임에서 시작된다.
 

지난해에는 ‘5월 어머니회’가 주축이 되어 옛 도청 부근에 ‘5월 어머니집’을 마련했다. ‘5월 어머니집’ 건물은 독지가들이 무료로 임대해 준 것으로 후원회를 모집해서 꾸려가고 있으며 현재 20여명의 회원들이 5월의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활동하고 있다.
 

‘5월 어머니회’ 회장을 맡고 있는 안성례 동문은 “5.18민주화 운동의 뒤편에서 묵묵히 일해 온 여성들의 역할이 잊혀지는 것이 안타까워 ‘5월 어머니집’을 생각하게 됐다”고 이야기했다. 안 동문은 “중요한 일을 했음에도 그동안 나타내지 않았던 사람들을 발굴했다는 점에서 ‘5월 어머니집’은 큰 의미를 가진다”고 덧붙였다.  
“어머니에게는 간장이 녹는 아픔과 내부의 강한 보호 능력이 있다”는 안성례 동문은 “앞으로 이 공간이 평화, 정의, 통일 운동을 구상하고, 많은 여성들이 쉬어갈 수 있는 ‘만인의 집’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전남대생 남다른 정신적 각오 다지길

“역사의 중심에서 살아왔다는 것에 대해 많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안성례 동문은 5.18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 아픔을 목격한 이후 지금까지 자신이 겪은 5·18민주화 운동을 증언하는 일을 하고 있다. 안 동문은 “5·18민주화운동 가운데 받은 고난이 나에겐 큰 은혜”라며 “5·18민주화 운동은 실제 광주 사람들의 생활지표에 영향을 주는 역사 변혁이었다”고 전했다.

  
5·18민주화운동의 진원지인 우리 대학에서도 5.18민주화 운동의 참 의미를 모르는 학생들이 있다. 이에 대해 안성례 동문은 “학교차원에서 5월 18일만이라도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사진을 전시해 끊임없이 그 정신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해줬으면 한다”며 “전남대 학생들은 역사 변혁의 주역들로서 남다른 정신적인 각오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어 안 동문은 “요즘 대학생들은 너무 즐기려고만 하는 것 같다”며 “공부를 열심히 하고 대학생으로서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대안은 없는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안성례 동문은 학생들에게 “제 2의 민주화는 낮아지는 것이며 자기 과시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무슨 일이든 정서적인 두드림으로 다가가면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안성례 동문은...
1951년 전남여중 졸업
1957년 우리 대학 간호학과 졸업
광주기독병원 간호감독
광주 YWCA 이사
초대 광주광역시의회 부의장
제2대 광주광역시의회 5.18특위위원장
대한 간호 정우회 이사
호남여성의원 협의회 의장
현 5월 어머니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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