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와인 붐 시작은 70년대였다. 태평양을 건너 일본에 와인 바람이 분 것은 이보다 10여년 늦은 80년대였다. 우리나라의 와인 바람은 일본보다 20년이 늦은 2천년대 말이다. 와인 소비는 소득이 높아질수록 증가된다는 등식을 증명하고 있다. 와인은 나라마다 컨셉을 달리한다. 와인의 본고장 유럽대륙에서는 일반 대중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술의 하나일 뿐이지만,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넘어가면서 신분을 상징하는 술이 되었다. 신대륙에서의 와인은 중산층 이상의, 보다 많은 교육을 받은 자제력 있는 사람의 상징이 되었고, 풍요한 삶을 나타내는 아이콘이 되어갔다. 일본과 한국도 이 같은 상징 조작에 젖어들어 가고 있다.
 

전통적으로 와인의 평가는 소수의 특정 인사들에 의해 은밀하게 이루어져 왔다. 소비자들은 이들의 평가에 따라 와인을 마셔야했다. 이에 따라 최고의 와인은 당연히 프랑스 보르도 또는 부루그뉴 산으로 각인되기에 이르렀다. 이 신념체계가 무너진 것은 1976년 프랑스 파리의 와인 품평회였다. 유수의 세계적 와인 평가자들이 “이거야말로 보르도 와인의 진수”라고 극찬했던 와인은 캘리포니아산 와인이었고, “이런 맛이니까 미국산 와인”일 수밖에 없다고 평가했던 와인이 보르도산으로 나타났다.

 

30년이 지난 2006년 재대결이 또 다시 프랑스에서 벌어졌지만, 결과는 프랑스 와인의 참패였다. 호사가들은 장인의 손끝에서 나온다는 전통으로서의 (프랑스)와인이 과학으로서의 (미국)와인에 패배한 것이라 애석해 한다.
 

미국은 또한 프랑스 와인너리들이 탐탁하게 여지기 않는 “와인의 황제” 로버트 파커를 갖고 있다. 그는 대학입학 전까지 와인 한잔 마셔보지 못했던 전형적인 시골뜨기였지만 지금은 그의 평가에 따라 전세계 와인시장을 웃고 울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와인에 수많은 수식어를 붙이는 전통적인 질적 평가에 100점 만점의 평가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와인의 평가체제를 바꾸어 버렸다. 와인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는 소비자일지라도 더 이상 책을 뒤지거나, 전문가들의 현학적 표현에 현혹되지 않아도 되었다. 그의 평점에 따라 95점 이상의 와인만 선택하면 안심하고 즐길 수 있는 최고급 와인이 되었다.

 

점수로 환산하는 방법으로 와인의 브루죠아적 평가체제가 무너지고 민주화됐다고 말해진다. 이 같은 평가 체제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평가 방법의 부적절함에 가장 강하게 반발했던 프랑스의 최고급 와인 생산자마저도 요즈음은 로버트 파커의 점수 평가방식에 따라 높은 점수를 맞을 수 있는 와인을 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평가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일이 어찌 와인에만 머무르겠는가. 미국 영국등 유수의 언론매체(USA Today, Times)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 각국의 대학의 순위도 사실 맥을 같이한다. 언론매체들이 내놓은 순위 안에 들기 위해서 대학은 이들이 만든 평가 기준대로 대학을 운영해야한다. 대학 나름대로의 특성이 무시된 채, 대학 구성원이 생각하는 대학의 본질과는 다른 획일적인 평가 기준에 대학이 끌려 들어가는 것이다.

 

와인의 점수화가 대중의 접근을 쉽게 하듯, 언론사의 대학 서열화가 대중의 대학 인지도를 용이하게 한 장점도 있지만 그 계량 척도가 대학의 질적 평가를 담보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와인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주는 충고중의 하나는 전문가 또는 언론 매체가 제공하는 와인 평에 현혹되어 와인을 사서 마시지 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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