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총을 쥐고 나를, 세상을 노려보고 있는 조승희의 모습이 좀처럼 낯설지가 않다. 문명세계를 대변하는 ‘대학과 공항’에 17년간이나 폭탄테러를 가했던 하버드 수학과 출신의 천재 교수 ‘유너바머(Unabomber)’, 테드 카진스키가 조승희로 환생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지성인 양성‘의 기치를 내걸고 있는 대학이라는 공간이 왜 반이성적, 반인륜적 행위의 극치라고 여겨지는 테러리즘의 자궁 역할을 번번히 맡게 되는 것일까?
 

기능적인 측면에서 멋없게 이야기 해보자면 대학은 금전과 권력으로 교환될 가치가 있는 지식이 치열하게 거래되는 ‘지식거래소(Knowledge Exchange)’이다. 문제는, 요즘 들어 이 지식거래소의 시황판에 하락을 나타내는 파란색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최첨단 기술과 정보, 온갖 ‘ism’과 ‘이슈’들로 인해 절대적 지식량은 항상 증가한다. 그야말로 붉은색 일색의 호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식 거래소의 구성원인 대학생들의 유일한 미덕은 가장 돈이 될 만한 ‘블루칩’ 지식을 선별하여 재빨리 소화해 내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어떤’ 지식이, ‘왜’ 지식거래소에 상장 되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은 거의 멸종되었다. 시황판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인간의 가치를 몸값으로 환산하는 일상에 회의를 느끼거나 존재로서의 ‘너’와 ‘나’의 어떠함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어지는 ‘과도한 순진함’의 작동을 감지하는 이들이 더러는 있기도 하다.

 

이들을 위한 사회의 처방은 다음과 같다: 한시라도 빨리 거래소 내부의 상담센터 혹은 담장 너머의 정신과를 찾아 고해성사를 하듯 조심스레 일탈욕구를 비워낼 것.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거래소에 복귀할 것.
 

조승희를, 유너바머를 옹호할 의사는 전혀 없다. 그들의 선택은 어떤 이유에서이든 분명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한 가지가 더 있다. 자아 내부에서만 메아리치던 목소리에 ‘언어’가 아닌 ‘죽음’의 형식을 부여하면서까지 그들이 간절히 원했던 것은 결국 발화(發話)행위라는 점이다. 왜 그들은 지식 거래소를 향해 언어를 내뱉지 못했던 것일까? 가슴과 머릿속의 담화가 입 밖에 나오기 무섭게 고드름으로 변해버리는 지식 거래소 내부의 냉정한 대기가 그들을 극단으로 몰고 갔던 것은 아닐까?

 

세계 지식거래소 시황판을 장식하고 있는 붉은 숫자에는 바로 우리의 혈액 역시 녹아들어 있음을 상기해 본다면 한국과 미국을 가르고 있는 거대한 지리적·문화적 경계의 존재를 핑계 삼아 조승희와 버지니아공대로부터 한걸음 비켜 서있으려는 시도는 민망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식거래소의 봄이 완연히 만발했노라 여겨지는 오늘이 누군가에게는 서럽게 뿜어지는 입김을 숨기고자 두터운 마스크를 쓸 수밖에 없는 잔인한 빙하기의 또 다른 하루일 수도 있다는 것이 조승희가 말하고자 했던 그 무언가는 아니었을까?

 

누군가의 입을 굳게 봉하고 있는 마스크의 존재에 대해서 봄의 전령인 황사를 피하기 위함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이들이 더 이상은 없기를, 오뉴월에 가슴감기 걸린 이들에게 ‘개도 안 걸린다더라’며 핀잔을 하는 대신 얼어붙은 손을 맞잡고 비벼주는 모습을 가끔은 목격할 수 있게 되기를, 적어도 인간 냄새는 맡아볼 수 있는 지식거래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정일신(대학원 임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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