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17대 국회의원으로 국민의 보건·의료를 책임지고 있는 강기정 의원.
 

그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보건·의료 분야는 태어나서 먹는 문제, 출산율, 병원, 인간적 생활 연금 장묘 기회에 관한 국민의 인생 전반적인 것을 다루고 있다.
 

강기정 의원은 “다른 부서보다 범위가 넓고 국민의 삶과 생존 문제에 집결되어 있기 때문에 재밌다”고 한다. 그는 보건복지위원회에서 국정감사에서 예산편성, 국가 정책, 입법 등의 일을 하고 있다.

 
그는 가족은 광주에 있고 홀로 서울 여의도에서 자취 생활을 하고 있다. 자전거로 국회까지 3분 거리를 출퇴근하고 있다. 그는 주말마다 광주에 와 주말에 가족과 만나며 지역구 활동도 겸하고 있다.
 

그는 ‘국회 사우나가 있는데 전날까지 싸움을 하던 의원들이 아침에 알몸으로 서로 대화한다’는 등 홈페이지 의정일기에 국회의원을 하면서 겪는 이런 저런 이야기도 쓰고 있다.

 

5·18 참여, 슬픔과 분노의 고교시절
강의원이 고등학교 2학년일 당시 5·18이 일어났다. 강 의원은 최초로 고등학생 시위를 한 대동고의 학생 중 한명이었다. 당시 대학생들은 금남로에서 시위를 하고 고등학생들은 법원 앞에서 시위를 했다고 한다.
강 의원은 5·18에 참여한 점에 대해 “당시 고등학생이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5·18때 사망한 고등학생도 많았다”며 “광주 시민이 맞고, 죽기도 했다는 소리에 분노해 본능적으로 방어욕구와 슬픈 분노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민족·민주·민중 ‘삼민투’위원장으로
강 의원은 “전대에 꼭 오고 싶었다”며 “마음속으로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그가 대학에 와 처음 했던 것은 서클활동이다. 공대에 와 입학식하고 다음날 ‘사회조사연구회’라는 서클을 들었다.
 

강 의원은 “순진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바꾸고 사람들을 사귀고 싶어서 서클에 들었다”며 “선배들과 이야기하며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궁금증을 풀어줄 책을 읽었다”고 했다. 그는 “서클에서는 ‘고민하지 않는 자 서클에 들어오지 마라’라고 했으며 끊임없이 물었다”며 “어떤 것 하나도 물음표를 붙이지 않은 게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과정에서 할 일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에 사회 참여를 했고, 군부독재에 저항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시위를 했던 것은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 당시 시국이 엄중했기 때문이다. 전경과 사법 경찰이 학교를 활보하고 다녔다. 양지 바른 곳은 경찰들의 공간이었으며 사법경찰이 공놀이를 하는 반면 학생들은 경찰을 피해 돌아다녀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강 의원의 소원은 5분 이상 시위를 해보는 것이었다. 강 의원은 “시위를 주동하면 사법 경찰이 잡아가고 동지들을 해산시키는데, 어느 방법이든 동원해서 5분 동안이라도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시위 이외에 대학생활의 절반은 사회과학 스터디와 세미나, 절반은 농촌활동, 동아리 활동 등을 했다.
 

그는 “당시 연애도 없고, 당구놀이, 다방도 갈 수 없었고 이성 친구와 팔짱끼어도, 자가용이 들어와도 안 되고, 007가방, 등산용 가방만 들고 다녔다”며 “학생들에게 시위 문화와 운동권 문화만 의무로 지워졌다”고 했다.
 

강 의원은 “대학생활이 인생에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며 “생각, 행위의 잣대가 되고 준거 틀을 마련해 주었다”고 했다.
 

그는 84년 말부터 학원자율화 조치가 취해지고 85년 4학년 때 삼민투 위원장을 했다. 80년대 학생운동을 대표하는 삼민투위원장. 민족, 민주, 민중의 삼민투는 5·18 이후 폭압적인 전두환 독재정권에 맞섰던 전국 주요대학에서 운동을 지도하는 조직이었다. 강 의원은 5·18 진상규명을 위해 전국의 동료들과 함께 미문화원을 점거하는 등 학생운동을 전개했다.

 

학생운동 8년형,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강 의원은 5·18 진상규명을 위해 학생운동을 전개하는 중 8년의 실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들어가게 됐다. 그는 감옥에서 사색을 하며 보냈다.
 

강 의원은 감옥에서 “전대에 다니며 5천명 앞에서 군부 독재 타도, 민주화, 화해와 통일, 패권주의 거부 등을 연설할 때 했던 얘기가 옳은지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었다”며 “내 행동에 추호도 후회하지 않았고 당당하고 본능적 행위였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시위 현장에서 기술적으로 잘했으면 좋았을 것이란 미련과 청중들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섰는가라는 물음, 좀더 운동을 해 볼 것이란 후회만 있었다”며 “감옥에서 더 세련된 신념을 갖고 체계화 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처음 감옥에 들어 갈 때는 엉겁결에 갔지만 2, 3번째 갈 때 마다 두려웠다고 한다. 그는 “‘이 일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주장하다가 잘못 됐다고 생각할 때 내가 주장하고 있는 행위의 일관성이 깨지지 않을까, 나를 지킬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감옥 복무기간 3년 7개월 동안, 행동을 지킬 수 있을지 두려웠다”고 했다.

 
청년운동 8년, 후회없이 최선 다해 헌신
89년에 감옥에서 나와 98년 12월 정치에 입문 할 때 까지 청년 운동을 했다.
 

그는 “정의롭고 진취적이며 예절이 바른 게 한국 청년인데, 불의에 타협하고 속박에 보수화되고 도덕적이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며 “이에 청년을 계몽해야겠다고 생각해 캠페인을 벌이고 선전과정에서 지금까지 4년 대학, 4년 감옥, 8년 청년운동, 5년 정치운동이 인생이다”고 했다.
 

그는 “스스로 너무 낭비했다는 생각보다 최선을 다했다고 느낀다”며 “화려하지는 않지만 성실하게 임했다”고 말했다.

 
“합법적 제도권 내 투쟁 위해 정치 입문”
그는 청년운동을 하며 “사회는 단순하지 않고 합법적 틀을 뚫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며 “시위와 거리투쟁을 해야 하나 분명히 합법적인 제도권 안에서 투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청년운동과 정치의 과도기로 아파트 조직위원회를 했다. 그는 아파트 공동체 연구센터에 대해 “의식화 조직화 협조 조직, 주민자치위원, 구·의원, 시의원 등은 중요한 변혁의 수단으로 사회 개혁 수단이다”고 했다.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를 할 당시 “떨어지면 창피하다. 정치꾼이 됐다. 변했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선거에 실패하고 이후 2004년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당히 당선됐다.

 
광주에 민주주의 전당 꼭 만들고 싶어
강 의원은 대학생들이 정치에 관심이 적은 점에 대해 “선거는 대학생의 삶에 매우 깊은 영향이 있어 정치가 잘 되지 않으면 배움의 장과 일터 문제가 심각해진다”며 “젊은이는 도덕성, 정의감에 비춰 정치가의 정책이 현실에 맞게 비춰서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회의원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는 정책이나 법을 노력 여하에 따라 정책에 관철 시켜 국민의 삶을 바꾸는데 이바지 할 수 있다”며 “국회의원도 좋고 제도 정치권에 들어가 국민에게봉사해 보라”고 했다. 그는 앞으로 6월 항쟁 20주년 기념으로, 정부 민주주의 전당을 지으려 한다. 강 의원은 “한국의 역사와 삶이 깃든 광주에 민주주의 전당을 꼭 만들고 싶다”며 “전당과 함께 쓰라린 역사를 기념하는 민주 공원을 만들려고 한다”고 했다. 그는 “문화중심 도시 광주, 전남대가 있는 광주, 문화의 전당이 있는 광주에서 민주주의 전당과 공원 중심지를 임기 말에 만드는 것을 추진하고 싶다”고 밝혔다.

 

강기정 동문은…
▲1964년 전남 고흥 출생
▲1982년 광주 대동고 졸업
▲1982년 우리 대학 전기공학과 입학
▲2004년 17대 국회의원
▲전 열린우리당 부대표
▲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
▲진실규명과 화해를 위한 당정특위 위원
▲국회 국민연금제도개선특위 위원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