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문학과 78학번 임낙평 광주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꿈을 크게 갖고 열심히 하면 원하는 것 이룰 수 있어

누구나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관심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은 사회가 되길 바라며 몸소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임낙평 동문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학생운동을 시작으로 현재 환경운동까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일을 묵묵히 해오고 있다.

 
학문의 자유가 없던 대학시절
 

유신체제, 서울의 봄, 신군부 세력의 군사 쿠데타, 전두환 정권... 임낙평 동문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사회적으로 억압받던 시기에 대학생활을 시작한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학사 일정이 진행될 수 없었고, 거의 모든 수업이 리포트로 대체됐으며 학생과 교수에게 ‘자유’란 찾아보기 힘들었다. 임 동문은 “그 당시 대학생에겐 자유가 없었고 조그만 사건이 일어나도 휴교령이 내려져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전했다.

그 시대 대학은 올바른 생각, 정의로운 생각을 가진 학생들을 감시하려는 형사와 정보원들로 인해 진리탐구의 전당으로서 기능을 하지 못했고 독재체제의 왜곡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심지어 형사들이 학교에 살면서 시위를 감시하기도 했다. 임낙평 동문은 “지금은 ‘학생회’라는 학생들의 자율적인 기구가 있지만, 그 때는 ‘학도호국단’이라는 이름 아래, 체제에 순응하는 학생단체가 있었을 뿐이었다”고 덧붙였다.

 
야학을 통해 민중의 아픔을 알다
 

“대학 시절, 사회문제에 대한 세미나나 토론을 합법적으로 할 수 없었다”는 임낙평 동문.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이 야학이었다. 그는 우리 대학 내 노동야학이었던 들불야학에서 노동자들에게 의사표현 하는 방법, 영어, 한글 등을 가르쳐 주며 노동자들과 친구가 된다.

임 동문은 “대학시절 야학활동은 민중의 아픔을 알아가는 과정이었고 소외받은 민중들의 현실을 공부하는 시간이었다”고 전했다. 야학활동을 하면서 임낙평 동문은 경제적 민주화를 위한 지식을 쌓았고, 대학에서 현실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다.

힘으로 체제를 유지하려던 시대, 임 동문을 비롯한 많은 학생들이 사회를 바꿔보기 위해 공부하고 고뇌하면서 정치적, 사회적 민주화를 위한 학생운동에 관심을 싹틔운다. 이러한 관심은 1980년 운동사적 측면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준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고 대학 사회는 사회운동의 중심이 된다. 임낙평 동문은 들불야학에서 함께 활동하던 박관현 열사, 윤상원 열사와 5·18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임 동문은 “5·18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유가 있을 수 있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5·18민주화운동 이후 임낙평 동문은 학생운동을 계속했고, 시위를 주동해 투옥됐다가 석방됐다.

 
학생운동에서 환경운동으로
 

임낙평 동문은 졸업 이후 환경 문제에 눈을 뜨게 된다. 당시 환경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부족했고 환경운동을 하는 단체도 없었다. “환경이 파괴되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없다”는 임 동문은 “건강한 사회로 나가기 위해 꼭 필요한 생태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전했다.

그는 89년 광주전남지역에서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과 함께 광주환경공해연구회를 형성해 광주시에 환경개선을 요구한다. 광주환경공해연구회는 그 해 영광핵발전소 가동에 반대하며 반핵운동을 전개했다. 광주환경공해연구회가 바로 지금의 광주환경운동연합이다.

임낙평 동문은 현재 광주환경운동연합에서 공동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광주환경운동연합은 기후보호프로그램과 영산강 살리기 운동, 녹지 확충을 위한 푸른 길 가꾸기 운동을 진행 중이다. 임 동문은 “요즘은 단체가 많이 발전했지만 막 생겼을 때에는 회원 수가 적었다”며 “환경운동이 곧 생명운동이다”고 말했다. “모든 학문이 환경과 관련이 있다”는 그는 “학문 탐구 과정 속에서 환경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비전이 있다”고 전했다.

임낙평 동문은 환경운동이 시민전체가 함께 할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어른들의 세대는 자연을 아는 세대인데, 개발시대에 태어나 성장한 세대들은 자연을 몰라서 환경이 그들의 관심사는 아니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이어 그는 “인류가 각성해서 생활방식을 바꾸는 데 부단히 노력해야할 것이며 특히 환경에 대한 자각이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사회 운동은 함께 하는 것
 

사회 운동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만큼 나보다는 남을 위해, 사회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험한 길을 선택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이렇게 힘든 일을 해오면서 한 번쯤 다른 직업도 생각해 봤을 법도 한데 임낙평 동문은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중요한 일에 발 벗고 나서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회 운동 현장에 돌아다니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NGO단체들과 함께 사회운동이 새로운 힘으로 등장했으며 사회 운동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대학 사회, 모순 구조에 제 목소리 내야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서 학생들이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 당당히 요구하고 의견을 나누는 창구로서 학생 운동은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꼭 필요하다.

대학시절 학생 운동에 그 누구보다 힘썼던 임낙평 동문은 “내가 대학에 다닐 때 학생 운동은 민주화에 초점이 맞추어졌었지만 지금의 학생운동은 국토분단이나, FTA문제와 같은 새로운 모순구조에 대한 자율적인 토론과 목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전했다. 임 동문은 “대학은 양심의 보루이자, 우리 사회의 거울로서 잘못된 제도와 사회를 개혁시키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곳”이라며 “대학이 물질주의와 속도주의, 개인주의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대학사회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꿈을 크게 가지고 경험의 폭을 넓히길
 

환경운동연합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나라를 둘러본 경험이 있다는 임 동문은 “봉사를 토대로 해야 직장 생활도 잘 할 수 있다”며 “대학생 때 경험의 폭을 넓혀 가난한 나라들에 가서 봉사도 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임낙평 동문은 “취직중심주의가 아니라 학문탐구에 힘쓰고, 꿈을 크게 가지고 나아간다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열심히 놀고, 열심히 공부하되, 최소한 사회를 위해 고민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임 동문은 “전남대학교가 진취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대학이 되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임낙평 동문은...

▶1958년 해남 출생
▶1985년 우리 대학 독문학과 졸업
▶1989년 광주환경공해연구회 창립 및 운영위원
▶1992년 브라질 유엔환경개발회의(리우회의) 참석
▶2004년 광주환경운동연합 상임집행위원장
▶2007년 광주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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