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대숙 원장은 광주·전남 지역 의료계에서는 알아주는 인사로 여성 불임관련 최고 권위자이다. 그는 산부인과 의사로서 호남권 최초 시험관 아기, 유전학센터, 내시경, 골반경수술, 대체의학 센터, 요실금센터, 미용성형 등을 전국 최초로 했다. MBN앵커, KBC 방송, 전남일보·광주일보 등에 건강이야기를 게재하고 여러 곳에서 건강강좌도 했다. 현재 광주 은병원 원장으로 원장일과 진료, 사업 등을 열정적으로 펼치고 있다.

 
중 2때 의사 되기로 결심

 

은대숙 원장은 중 2때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은 원장은 “아버지가 목사이고 사회사업을 하다보니 의사가 필요하다고 했다”며 “큰딸로서 의사가 되어 도와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5년 뒤 전대 의대생이 된다. 그는 집이 부유하지 않아 예과 때는 주로 과외를 하고 시간이 있을 때는 취미생활, 전국순례를 했다. 본과 때는 주로 공부와 선교활동을 했다.

은 원장은 “가난해서 학비를 벌어야 했다”며 “장학생이 되려고 좋은 성적을 얻으려고 노력했고 과외는 보통 3~4개까지 했다”고 했다.

은 원장은 “의대에 남학생이 다수를 이뤘지만 여학생으로 불편한 점 없이 단합이 잘 되었다”며 “여학생끼리 전국 순례를 하고 다녔다”고 했다. 그는 예과시절 연세대, 서울대, 경북대 등의 대학 의대생을 찾아 전국순례를 했다.

그는 “미리 엽서를 띄어서 몇 시에 가겠다고 하면 그곳 학생들이 역까지 마중나왔다”며 “서울이나 부산 쪽은 잘 살기 때문에 대접을 잘하고 따뜻하게 해줘 적은 돈을 가지고 가서 오히려 돈이 남았다”고 했다. 그는 “처음엔 득을 보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교류하자고만 했지만 다른 세상, 다양한 사람을 접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은 원장은 등산 산악반을 들었고 취미생활로 음악, 미술 등을 했다. 그는 특히 미술에 관해 “당시에는 유치했지만 나중에 도움이 많이 됐다”며 “병원을 손수 꾸미는데 미적 감각을 제공해 주며 암 치료를 하는데도 좋다”고 했다. 실제로 그의 병원도 그가 직접 꾸몄으며 미술을 통해 암 치료도 하고 있다.

그의 의대 본과 생활은 공부와 선교생활이 주를 이뤘다. 그는 “의대 공부는 생각한 만큼 해도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다”며 “자신에 대한 실망과 스트레스로 살았다”고 했다. 그는 공부가 어렵다고 느껴 “세상은 나를 힘들게 하고 왜 무거운 짐을 주고 시련을 주고 많은 것을 요구하는지 너무 힘들었다”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선교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에 대해 “학교는 내게 의사자격증을 줬다”며 “학교는 훈련 시스템으로 인재를 양성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 대학시절의 은대숙 원장(왼쪽에서 네번째)
인턴 전까진 정신과 의사 되고 싶어
 

은대숙 원장이 산부인과를 선택하게 된 것은 인턴으로 여러 과를 돌면서이다. 의사의 꿈을 꾼 뒤 인턴 하기전까지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는 “인턴을 돌아다니며 내가 여자이고 활발한 성격이라 대화하는 것보다 움직이는 것을 좋아해서 산부인과로 바꿨다”고 했다.

은 원장은 산부인과를 들어간 뒤 환자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애를 낳고 나서 하루 지난 뒤에 병원에서 애기를 두 명이나 받았다”며 “한 명은 후배가 못한다고 해서 받고 한 명은 환자가 자신에게 부탁해서 받았다”고 했다. 또한 그는 “환자가 애를 바로 받을 수 있도록 침대 밑에서 자 진통이 오면 바로 애기를 받았다”고 열정적인 의사 생활을 말했다.

은 원장은 환자에게 직설법을 쓰지 않고 희망적인 얘기를 해준다. 그는 “일반 의사들은 불임환자에게 불임인 이유와 앞으로 고생한다는 것을 말한다”며 “그게 사실이지만 환자에게 직설법 대신 희망을 주는 얘기를 해야 된다”고 했다. 그는 “불임환자에게 다른 사람보다 애기를 늦게 가질 수 있으며 늦게 가지는 것만 고생할 뿐 예쁜 아가가 생길 것이라고 말한다”며 “불임 환자들은 불임 하나 때문에 세상의 짐을 다 지고 가는 이도 있지만 생각과 사고의 방향을 조금만 틀어주면 다르게 보인다”고 했다.

 

모든 단점은 장점으로 통한다
 

은대숙 원장은 “모든 단점은 장점으로 통한다”며 자신에 대해 “일을 저지르는 것을 좋아하고 귀도 얇아서 쑥 넘어간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점은 지금의 은대숙 원장을 있게 한 점이다.

그는 “좋은 것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한다”며 “하다보면 여러 가지를 벌려놓고 내일은 어떻게 해야지 하는 생각에 잠도 잘 자지 못한다”고 했다.

이런 점에 주위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직원들은 여러 가지 일을 벌이는 은 원장에게 일만 벌려놓고 한 가지 일도 제대로 못 할 것이라고 했다. 주위 교수들은 잘난 체 하지 말고 사기치지 말라고 말했다. 산부인과 의사로 요실금을 처음 다루려할 때 삼성생명에서 산부인과가 하지 않는 것을 한다고 소송을 건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은 원장은 이런 점으로 여러 센터를 세우고 새로운 일을 개척하며 의료계에서 선두자가 됐다.

그는 2000년에 모이세메디칼이라는 의료 정보교환 홈페이지를 만들어 의료 정보의 공유화의 첫 포문을 열었다. 당시 의료계는 폐쇄적으로 특수 기술을 절대 남에게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비밀로 하고 안 보여 주어야 이득을 많이 얻을 텐데 특수 기술을 왜 알려 주는가’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후진 주자들에게 위협을 받지만 그게 두려워서 오히려 더 연구하고 책을 보게 된다”고 했다.

그는 “의사가 보수적이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을 나 자신은 이런 단점 때문에 빨리 했다”며 “이런 점이 없었다면 하지 못했을 것이다”고 했다. 그는 “단점을 통해 손해를 많이 보지만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많이 배우고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며 “배움의 진정한 교육은 고통을 느낄 때이다”고 했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은 없다
 

은 원장은 “우리나라는 자살률이 높은데 이는 자기 자신에게 실망감, 포기하려는 생각, 자존심의 상실 때문”이라며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실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외국어나 글쓰기 등 자기 스스로 계발하려고 노력하는것이 중요하다”며 “앎에 있어 5년에서 10년 후를 봐야 한다”고 했다.
은 원장은 “실패한 이의 이유는 변명에 불과하며 사람들은 실패한 이유를 귀담아 들어주지 않는다”며 “꼭 올라와야 알아주며 성공하면 공기가 신선하고 향기롭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내시경 수술, 메스가 필요 없는 수술을 시도하려고 한다”며 “내시경은 미세 침습 수술로 살을 째지 않아 흉터가 남지 않는다”고 했다.

 

은대숙 동문은...

▲ 1957년 출생
▲ 1983년 우리 대학 의대 졸업
▲ 1987년 산부인과 전문의 자격증 획득
     광주보훈병원 산부인과 과장
▲ 1988년 은대숙 산부인과 의원 원장
▲ 1996년 은병원 부원장
     은병원 유전학연구소 소장
     은병원 불임연구소 소장
▲ 2001년 호남 불임의학연구소 원장
▲ 2004년 은병원 웰빙(노화, 비만 전문)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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