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가 처음 내놓은 <자기의식과 존재사유>는 서양 존재론의 흐름을 재구성한 책이지만 새로운 사유의 씨앗은 여기서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 옛 철학자들은 “존재의 빛”을 동경했지만 저자는 “없음의 어둠”을, 그리고 “비어있는 가난함”을 말한다. 그 속에서만 우리는 서로 만날 수 있다고 그는 믿기 때문이다.

이어서 <나르시스의 꿈>에서 저자는 서양정신의 숭고와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한편 그것이 품고 있는 나르시스적 몽상을 치밀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풍요에 대한 나약한 원한감정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비어있는 가난함을 마주하려는 정직함 때문이었다. 그 가난함에 저자는 슬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 역사가 겪어야 했던 크고 깊은 슬픔, 그것이 그의 철학의 출발점이다. 2005년에는 이 책에 대한 철학자들의 토론회가 열렸고 그때 저자가 발표한 글 “나르시스의 꿈을 넘어서”가 새 책 <서로주체성의 이념>의 초고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나르시스의 꿈>의 속편인 셈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서로주체란 ‘우리’의 다른 이름이다. 내가 너를 만나 우리를 이룸으로써만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저자는 ‘서로주체성’이라 한다. 그렇다면 나와 너는 언제 우리가 되는가? 그것은 우리가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 때라고, <나르시스의 꿈>에서 저자는 힘주어 말했다.

그것은 자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타자와 만날 줄 모르는 이들이 꿈꾸는 주체성, 곧 ‘홀로주체성’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슬픔은 끝이 아니다. 서로주체도 주체인 한에서 능동성과 자발성을 가져야 하는데, 슬픔은 그 자체로는 전적인 수동성과 무력함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슬픔을 말하는 것은 그것을 미화하고 자기연민에 빠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슬픔을 함께함으로써 생겨나는 새로운 능동성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서로주체성의 이념>에서 저자가 말하는 그 능동성이란 “나와 네가 서로의 고통에 응답하고 그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값싼 연민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고통당하는 이와 함께 싸우는 것을 뜻한다. 결국 ‘우리’란 “같이 고통 받고 같이 싸우는 사람들 그리고 싸우면서 같이 형성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하여 <나르시스의 꿈>을 “슬픔의 해석학을 위한 첫 걸음”이라 칭했던 저자는 이제 <서로주체성의 이념>을 일러 “동학농민항쟁에서 광주항쟁을 거쳐 1987년 6월항쟁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모든 자유를 향한 항쟁에 대한 철학적 헌사”라 한다.

서두에서 저자는 이 책에 담긴 사유를 광주에서 5·18민중항쟁을 성찰하면서 완성할 수 있었다고 밝히는데, 2005년의 초고와 오늘의 책을 비교해보면 이것이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초고가 슬픔을 말한다면, 광주에서 씌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부분은 슬픔을 항쟁으로 이끈다. 이 책은 광주와의 만남이 낳은 책이며, 그 자체가 서로주체성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박정민 (철학과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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