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은요? 아직 자리 있나요?’ ‘마닐라나 세부로 가시는 분은 없나요? 같이 가게요!’ ‘괌으로 가는 제일 싼 표는 어떻게 해야 구할 수 있나요?’ 요즘 자주 들르게 되는 미국 유학준비 사이트의 게시판에는 하루에도 몇 건씩 이런 글들이 등장한다. 미국유학을 준비하는 한국 학생들이 유학에 앞서 세계여행에 나서고 있는 까닭은 대체 무엇일까?

미국대학원 진학을 위해서는 GRE라는 시험성적의 제출이 필수적이다. 물론 세계 각국에는 GRE 시험장이 마련되어 있다. 원칙대로라면 인터넷으로 시험을 예약하고 근처 시험장에서 응시한 뒤 성적을 미국 대학원에 발송하면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과거에는 시험지를 통해 치러지던 GRE (PBT방식)가 컴퓨터를 통해 치러지도록(CBT방식) 변경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CBT 방식에서의 문제출제유형이 일정한 SET으로 고정되어 있음을 발견한 한국과 중국의 학생들이 소위 말하는 ‘후기’, 즉 기출문제를 인터넷 상에 공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과 중국의 GRE 응시자들은 ‘후기’의 덕을 톡톡히 보며 미국 본토인들의 점수를 훨씬 상회하는 고득점을 하기에 이르렀다. 미국대학원 및 GRE 주최 측이 이러한 상황을 묵과할 리 만무했다. 2003년부터 한국과 중국, 두 개 국가에 대해서만 CBT에서 PBT 방식으로 회귀할 것임을 전격 발표한 것이다. PBT 방식의 GRE에서는 원천적으로 ‘후기’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낮은 PBT점수를 얻은 한국 학생들은 높은 CBT 점수를 획득한 전 세계 학생들과 미국 대학원진학을 놓고 경쟁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쉽게 물러설 한국학생들이 아니었다. 세계 어느 곳이던 가서 ‘후기’를 무기삼아 CBT 방식의 GRE를 응시하고 고득점하면 되는 것임을 간파한 한국 학생들이 가까운 일본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위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올 7월부터는 IBT 방식, 즉 더 이상은 ‘후기’가 적용될 수 없는 획기적인 GRE가 전 세계에서 동시에 실시된단다. 7월 전에 CBT로 고득점하지 않으면 미국 대학원은 영영 못 가게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느낀 한국학생들은 이제 괌, 세부, 태국 등과 같은 미지의 시험장까지 개척하고 있다. 첫머리에 언급한 미국 유학준비생들의 ‘세계여행’ 물결은 바로 이 ‘개척자 정신’의 산물인 것이다.

미국유학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는 잠시 논외로 하자. 하지만 왜 ‘후기’의 존재가 유독 한국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인지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듯싶다. 항상 ‘최고’의 결과를 장려하고 때로는 강요하면서도 ‘최선’의 과정을 거쳤는가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한국의 대학사회는 책임을 피하기 힘들어 보인다. 시험기간만 되면 온 강의실 책상이며 벽을 뒤덮는 깨알 같은 ‘암호’들의 정체가 ‘후기’의 존재와 묘하게 오버랩 되어 떠오르는 것도 우연은 아닐 테니 말이다.

 전남대에서 ‘암호’의 어두운 그림자를 모두 없앨 수 있는 사람이, 그리하여 결국에는 ‘후기’라는 어두운 빛을 찾아 일본·태국·세부·괌 등지로 ‘시험여행’을 떠나는 한국 학생들의 슬픈 자화상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당신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순진한 것일까? 너무 과한 것일까?

정일신(대학원·임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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