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 아시아 최초, 대한민국 최초. 최초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들 중 맨 처음이기에 큰 의미를 갖는다. 최초는 역사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그런 ‘최초’와 ‘여성’이 만나면 더 값진 의미가 된다. 2002년 1월 남성들이 대부분인, 군이라는 집단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장군이 탄생한다. 바로 양승숙 동문이다.

 


백의의 천사가 되기로 결심하다
“내가 대학에 들어갈 당시에는 여학생에게 있어서 간호사나 교사가 되는 게 가장 큰 희망이었다”고 말하는 양승숙 동문. 양 동문은 딸이 여섯이나 되는 딸 부잣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아들도 대학을 제대로 못 보내던 시절 양승숙 동문의 부모님은 ‘혼수는 못 해줘도 교육은 제대로 시키겠다’는 의지로 딸들을 대학에 보냈다.

첫째 언니와 둘째 언니가 간호학과에 입학하게 되자 양 동문도 자연스레 간호학에 뜻을 품고 백의의 천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부모님의 짐을 덜어드리기 위해서 양승숙 동문은 국비 지원을 받아 1970년 우리 대학에 입학했다.

간호대학에 다니던 때 기숙사 생활을 했다는 양 동문은 “난방이 안 되는 목조 건물에서 한 방에 여덟 명씩 생활을 했는데 한 이불을 덮어가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고 학창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다. 간호학과 2학년 시절 양승숙 동문은 영화 ‘매쉬’를 만난 후 색다른 백의의 천사를 발견했다. 영화 속에서 전쟁을 따라다니며 군인들을 간호하는 미국 간호장교의 모습에 큰 매력을 느낀 것.

▲ 간호학과 70학번 양승숙 전 국군간호사관학교장
양 동문은 “미국에만 있는 줄 알았던 간호장교를 한국에서도 간호대학 졸업 후에 장학생이 되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친구 네 명이서 신청해 합격했다”며 “합격한 후에 제출서류 때문에 고향에 내려갔는데 아버지께서 처음엔 반대하셨다”고 전했다. 하지만 아버지도 딸의 큰 꿈을 꺾을 수는 없었고 양승숙 동문은 간호장교로서의 길을 걷게 됐다.

즐거움과 고통 느끼던 장교 시절
양승숙 동문은 국가고시 합격 후 1973년 국군 군의학교에서 간호 후보 29기 소위로 임관했다. 군인이 아닌 간호사라서 훈련을 별로 안 할 줄 알고 긴 머리 그대로 친구들과 소풍가는 기분으로 들떠서 들어간 군의학교에서의 생활은 양 동문의 예상과는 빗나갔다. 그는 “머리카락은 바로 잘렸고, 군복을 받아 입고 6주 동안 군인들과 똑같이 훈련을 받았다”며 “담장 밖의 세상이 딴 세상 같았다”고 말했다.

양 동문이 간호장교로 활동하던 시기는 베트남전쟁이 끝난 후 철수하던 시기였다. 양승숙 동문은 “부상병들이 많았는데 군인들은 보호자가 없으니 간호장교가 그들의 애인이자 어머니였다”며 “군인들의 옆에서 건강해져가는 모습을 볼 때 가장 보람을 느꼈다”고 이야기했다. 즐거움과 고통스러움을 동시에 느끼면서 임상에서 활동한 시기가 가장 행복했다는 양 동문은 “원래 간호장교의 의무복무기간은 5년인데 덕분에 31년이라는 긴 시간을 간호 장교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남성들이 모인 군이라는 집단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었을 법도 한데, 양승숙 동문은 “남성이 많다고 해서 남녀차별에서 오는 어려움은 전혀 없었다”며 “오히려 군에서 간호장교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반겨주었다”고 전했다.

아주 좁고 긴 터널을 지나
1998년 IMF 당시 기업들이 파산위기에 처할 무렵 국군간호사관학교 역시 폐교가 돼서 2년 동안 학생들을 받지 못했다. 남은 학생들이 졸업하면 교문을 닫게 될 위기에 처했다. 대령이었던 양승숙 동문은 국군간호사관학교 교장으로 부임해 주변의 반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학교를 살리기 위해 도움의 손길을 찾아다녔다. 군에서 지휘관은 자기 지역을 이탈하면 안 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양승숙 동문은 감시받는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의 차를 타고 다니며 여러 지역의 여성 사회단체들과 정치인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 힘썼다.

2001년 3월 여러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마침내 국군간호사관학교를 존치하기로 정부의 승인이 떨어졌다. 양 동문은 “학교가 살았다는 소식에 학교가 온통 눈물바다가 됐고, 학생들은 기뻐서 소리질렀다”며 “그 때 기분은 마치 아주 좁고 긴 터널을 지나온 것 같았다”고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 첫 여성장군으로 진급한 양승숙 준장이 지난 2002년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삼정도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 여성장군이 되다
양승숙 동문이 학교를 살리고 얼마 되지 않아 군내에서 장성진급 발표가 있었다. 진급 발표가 있기 전까지 양 동문은 최초의 여성 장군 후보에 오르내리지 않았다. 당시 군에서는 최초 여성장군은 사관학교 출신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여성장군을 뽑는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마지막 임기 공약 사안이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여성장군이 되는 것은 확실했다.

양승숙 동문은 “내가 갖추어야 하는 일들은 항상 최선을 다했고 민간대학 출신으로 국군간호사관학교를 살리는 데 힘썼기 때문에 속으로 믿음이 생겼다”고 전했다. 발표가 나는 날 그 누구도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 양 동문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나라 최초 여성장군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 당시 기분에 대해 그는 “기쁘기도 했지만 국군간호장교뿐 아니라 여군 전체를 위한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거워졌다”고 말했다. 이어 양승숙 동문은 “최초 여성장군이어서 대통령께서 직접 칼을 전해주셨고 주변 사람들에게서 많은 환영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여군 넘어 여성 전체의 대변인으로
2004년까지 국군간호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하다 예비역으로 편입한 양 동문은, 간호장교와 여군을 넘어 여성의 대변인 역할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열린 우리당에 입당했다. 이후 17대 총선에 출마해 낙선하고 현재 열린우리당 충남도당 중앙위원과 한국전력공사 비상근 감사로 활동 중이다. 양승숙 동문은 “군에 있을 때는 정치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여성들을 위한 법이 필요하고 여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정치를 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활동을 비롯해 내년 4월 국회의원 선거를 준비하기 위해 많이 움직이고 있다”며 “지역구 관리와 여성 조직 관리에 힘쓰겠다”고 전했다.


“가지 않은 길 속에 창조가 있다.”
양 동문은 매일 새벽 5시에 5km씩 달린다. 웬만한 정신력이 아니고서는 아침잠을 이기기 힘들다. 양승숙 동문은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다른 일에서도 잘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가 여성 최초의 장군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다.

간호대학 시절 ‘시간이 생명이다’는 것과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을 배웠다는 양승숙 동문은 후배들에게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자기만의 시간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며 “대학생 때는 무한한 기회가 있으니 자기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전남대생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안 된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잘 될 거야’라고 생각하며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 최고가 되라”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양 동문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택해서 걷다보면 그 속에 창조가 있을 것”이라며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 후배들이 되길 바란다”고 힘주어 말했다.

 

양승숙 동문은...
▲ 1950년 충남 논산 출생▲ 우리대학 간호학과 졸업▲ 한양대 대학원 간호행정학 석사▲ 간호후보 29기 소위 임관 ▲ 국군 논산, 1군 사령부 간호관리 장교(중령) ▲ 국군간호사관학교 교장(대령) ▲ 장군 진급▲ 열린우리당 충남도당 중앙위원 ▲ 한국전력공사 비상근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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