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문호가 열리던 시기, 32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 갔다. 그 때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3백 달러였다.” 

“이민 문호가 열리던 시기, 32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 갔다. 그 때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3백 달러였다.”

우리 대학 사학과 출신인 정수일 동문(사학·61학번)은 현재 미국에서 연간 매출액 5천만 달러 규모의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재미사업가다.

원래 정수일 동문은 대학에 다니기 전부터 외국으로 유학을 가 전공인 서양사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었다. 공부를 한 후 교수가 되길 원했다. 그는 “외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에 고등학교 때는 현지 영어를 배우기 위해 직접 미국 공보원에 가서 공부하기도 하고 대학에 와서는 영문과 대학원 수업을 청강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정말로 졸업하고 군대를 마치고 난 후 1973년 그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하지만 이민 와서 보니 생활이 우선이었다. 정수일 동문은 “공부도 해야 했지만 그 당시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3백 달러가 전부였다”며 “생활을 위해 당장 일을 시작해야 했다”고 처음 일을 시작한 때를 이야기 했다. 그는 미국에 온지 3일 만에 맨하튼 구경을 갔다가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큰 백화점에서 임시직을 모집하는 것을 보고 그 길로 찾아가 바로 일을 시작했다. 그는 “그 때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던 시기라 임시직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며 1973년 12월 3일 그 날을 날짜도 잊지 않고 기억했다. 그 일을 하고 난 후 그는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 적은 자본으로도 할 수 있는 행상 일을 시작했다.

행상 이야기를 하며 그는 어린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자식을 키우기 위해 곡성에서 행상도 하고 남의 집에서 일도 했다. 그는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했고 가난 때문에 설움을 많이 받았다”고 이야기 한다. 1950년 6·25 전쟁 때 광주로 피난 와 살면서 고생을 한 탓에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어려움을 이겨낼 저항력을 이 때 배운 것 같다고 말하는 정수일 동문. 그는 “어렵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형편 때문에 중학교에 바로 입학하지 못하고 1년을 쉬었다”며 “그 때문에 공부에 대한 열정이 더 커 대학교까지 전 과정을 장학생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수일 동문은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가발 행상을 시작했다. 그것도 모두가 포기하는 장사 안 되는 자리를 선택했다. 처음에는 25불을 벌었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오나 하루도 쉬지 않고 장사를 했다”고 운을 떼며 “행상을 하면서 가발을 사용해 놓고 다시 환불해 달라는 서러운 일들도 있고 육체적인 어려움도 있었지만 성실히 하니깐 가발 장사로 하루에 2천불도 번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1년간 행상을 하고나니 자본이 생겨서 소매업을 시작했다.

소매업 시작 1년 후 그는 1977년 4월 코리아 트레이딩(Korea Trading)이라고 하는 무역 도매 회사를 차렸다. 한국, 대만, 일본, 홍콩, 중국 등의 나라에 가서 물건을 받아 도매의 중심 브로드웨이에서 팔았다. 그는 “그 당시 내가 도매, 무역을 시작한 것이 뉴욕 교포 사회에서 개척자 역할을 한 것이다”고 설명하며 “새벽 5시에 일어나 일을 시작하고 가장 늦게 문을 닫는 일상 이었다”고 떠올렸다. 그렇게 열심히 일한 결과 한인사회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성공하게 됐다.

그는 “이민자에게 열려있는 미국은 나에게 기회의 나라였다”며 “이 곳에서 어려움을 이겨내고 고생을 많이 한 게 인생의 자산 이었다”고 어떤 일도 자신 있게 해 나갈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말했다. 또한 그는 “타국에서 생활하다보면 자신이 없어 한국인임을 숨기거나 모교를 숨기는 경우들이 있는데 남보다 바르고 정직하게 생활했다면 당당하게 한국인임을 밝히는 자세가 중요하다”며 “그것이 애국심”이라고 말했다.

그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우리 대학 정득규 전 총장이 미국에 방문했을 때 숙소를 제공하면서부터 우리 대학과 인연이 다시 시작됐다. 그 후 동창회 뉴욕지부가 생기면서 그는 우리 대학 동창회를 위해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2001년에는 우리 대학에 발전기금으로 5천 달러를 기부 해 심적·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우리 대학 5회 용봉영예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제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는 정수일 동문은 “옆에서 고생한 아내와 함께 여행도 하고 다니면서 인생을 정리하고 싶다”고 말했다. 교회 장로인 그는 “남은 시간동안 가난한 자를 위해 학교에 기증도 하고 이웃을 돕고 살고 싶다”고 앞으로의 계획도 이야기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전남대 학생들은 인재라고 생각한다”며 “어느 분야에 가든지 앞서가고 성공할 수 있다”고 후배들을 신뢰했다. 이어 그는 “‘오늘이 나의 전부다’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으면 한다”며 결국 순간이 쌓여 자신의 인생이 된다는 삶의 지혜를 이야기 했다.

/이수현 기자 1004gamsa@hanmail.net


정수일 동문은…

▶ 1965년 전남대 사학과 졸업

▶ 1973년 미국으로 이민

▶ 1977년 Korea Trading 회사 설립

▶ 1988년 미국 한인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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