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들, 많은 경험과 어학 능력 기르세요” “내가 왜 이 곳에 늦게 왔는가? 좀 더 일찍 왔다면 더 큰 사업을 이루었을 텐데…” 


“후배들, 많은 경험과 어학 능력 기르세요”

“내가 왜 이 곳에 늦게 왔는가? 좀 더 일찍 왔다면 더 큰 사업을 이루었을 텐데…”

우즈베키스탄에 좀 더 일찍 오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는 박양균 동문은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에서 방직관련 회사인 ‘금성’의 대표를 맡고 있다. ‘금성’은 방직 회사를 상대로 실을 감는 실 패와 지관, 페이퍼 콘, 페이퍼 튜브 등을 생산하고 티셔츠를 만들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세계 3대 목화 생산지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방직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세계시장의 경쟁력을 갖춘 회사는 단지 30~40개 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박 동문의 회사 물품은 중앙아시아 방직관련 시장의 80%를 차지하고 있으며 연 매출 1천만 불을 바라보고 있다.

박 동문이 처음 우즈베키스탄을 온 것은 1998년 한국의 IMF한파가 끝나지 않은 때이다. “IMF로 인해 힘들었던 시절, 우즈베키스탄은 탈출구였다”는 박 동문은 “처음 우즈베키스탄의 모습은 한국의 70~80년대를 보듯 암울하고 어두웠다”고 회상한다. “여행 자금만 들고 우즈베키스탄에 왔다”는 그는 “처음에는 기업 에이전트로 시작해 화장품 제조업, 농산물 가공업, 지금의 방직업을 하게 됐다”고 말한다. “침대는 과학이다”라는 말처럼 페이퍼 콘도 과학이다”라고 말하는 박 동문은 “페이퍼 콘을 만들 때 정확한 각도와 일정한 크기를 만드는 기술이 중요하다”며 “금성은 4년의 기술 노하우로 방직 산업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또 “회사 자체에서 티셔츠를 생산해 미국으로 1백 퍼센트 수출하고 있다”고. 박 동문은 “사업의 성공 비결은 간단하다”며 “단가는 낮게, 품질은 최고를 지향해 소비자의 입장을 맞추면 된다”고 한다.

박 동문은 방직업을 하며 가장 어려웠던 점을 “직원들과의 언어와 문화관습의 차이로 괜히 의심하고 불신감을 가진 일”이라고 한다. 지금 금성은 한국 직원 7명, 현지 직원 4백 명을 고용해, 직원들의 복지에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박 동문은 “우즈베키스탄의 회사들은 직원들의 복지에 대한 관심이 적고 월급 또한 높지 않지만 우리 회사는 직원들에게 무상으로 점심과 출·퇴근 버스를 제공하고 다른 공장에 비해 높은 봉급을 준다”고   말한다.

박 동문은 현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여행 전문가 도용복 씨의 가이드가 되어 투르크메니스탄을 여행 한 것”이라고 한다. “4천 미터 이상의 높은 고지를 인내로 올라 선 파미르 고원, 모든 생물이 죽은 듯 고요한 카스피해에 비춘 둥그런 달 하나로 수영한 일, 뜨거운 사막 여행은 평생 잊을 수 없다”며 “가족들과 꼭 같이 여행하고 싶은 곳”이라 한다. 도용복 씨와 함께한 투르크메니스탄 여행은 ‘신비한 나라 투르크메니스탄’이라는 책으로도 나왔다. 박 동문은 “여행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며 배운 것이 너무 많다”며 “후배들에게도 많은 여행을 권장한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바쁜 업무와 술로 시간을 보내는 대신 일찍 해외에 나가 경험하고 배워 눈을 키웠다면 어려운 상태에서 우즈베키스탄을 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아르바이트, 여행, 자원봉사, 책을 통한 간접 경험을 많이 키우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 “필요할 때만 잠깐 어학공부를 하는 것이 아닌 꾸준히 어학공부를 해야한다”며 “전화기로 상담 정도는 받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제치고 어학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을 강조했다.

“고 정주영 회장의 말처럼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할 일을 할 수 있는 그릇이 되도록 인내와 고통을 참고 꿈을 이루길 바란다”고 했다. 박 동문은 “공장 직원이던 우즈베키스탄의 대학생은 코리아드림이라는 꿈을 갖고 열심히 일했다”며 “전남대 학생들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을 당부했다.

/장옥희 기자 sushoo@hanmail.net


박양균 동문은…


▶ 1982년 전남대 농생물학과  입학

▶ 1998년 우즈베키스탄으로 건너감

▶ 2002년 방직업 ‘금성’ 대표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