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처음 태어난 태초부터 지금까지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의문은 인간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끝없는 탐색을 계속해 왔다. 인문학은 인간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이 처음 태어난 태초부터 지금까지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의문은 인간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끝없는 탐색을 계속해 왔다. 인문학은 인간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해서 다른 학문 특히 응용학문이 시작되고 진행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은 곧잘 모든 학문의 지하수에 비교된다. 지하수가 마르면 지상의 모든 생명이 말라죽는 것과 같은 이치로 인문학이 튼튼해야 다른 학문도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다.

인문학이 우리 일상의 도처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1969년 아폴로 11호 우주선이 임무를 충실하게 완수하고 성공적으로 귀환함으로써 미국은 우주 항공 기술에서 그 당시 치열하게 경쟁했던 옛 소련에 절대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우주선의 성공적 귀환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닉슨 대통령은, ‘이제 우리 미국은 철학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아무리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 기술을 과시한다고 하더라도 그 바탕에 인문학적 소양이 깔려있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기술에 불과하다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현재 세계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로 대표되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도 자신의 끝없는 변신과 발전은 자신에게 내재하는 인문학적 상상력에 의해서 가능한 일이었음을 고백한 바 있다. 최근까지 상영된 영화 ‘괴물’이 첨단의 영상 기술을 선보이면서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웠지만, 이 영화의 근저에 ‘괴물’을 통한 인문학적 상상력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며,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 또한 가족 사랑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 정신에 있다. 영화 ‘왕의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사적에 한 줄도 채 기록되지 않은 광대 ‘공길’을 찾아내고, 그를 통하여 우리는 무한한 상상력과 창조적인 힘을 보여주고 있다. 모두가 인문학적 사유를 통하여 새로운 예술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적 정신과 가치를

경시하는 사회구조와 정부


이와 같이 인문 정신이 일상과 함께 숨 쉬면서 모든 학문의 정신적 자양분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최근 십여 년에 들어서 학문적으로 그 위상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두고 인문학의 위기라고 말하고 있는 실정에 있다. 위기라는 표현이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손 치더라도 학문의 중심에 있어야 할 인문학이 근자에 들어서는 자꾸 변방으로 내몰리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면 지금과 같은 인문학의 쇠퇴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그 요인은 상당히 복합적인 일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인문학적 정신과 가치를 경시하는 사회구조의 변화와 이를 주도한 정부 당국에 그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책임 못지않게 사회의 변화와 정부의 정책에 순응한 대학과 변화와 제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인문학계 내부에도 책임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압축성장의 과정 속에서 사회는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하고 실용성과 효용성만을 내세우다가 보니 그 안에서 인문정신은 급작스럽게 함몰되고 갔으며, 정부는 무한경쟁시대의 이념적 기반인 신자유주의적 사고 속에서 무제한적인 발전에만 몰두함으로써 인간에게 물질 못지않게 정신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대학은 이러한 사회 현상의 흐름과 정부의 무지에 간간히 문제 제기를 하고 때로는 저항도 해 보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는 서서히 무력감에 빠져 들었고, 어떤 때는 값싼 당근에 쉽게 주저앉아 버리는 과오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인문학계 내부에서도 이러한 변화와 사회현상에 대하여 진지하고 차분하게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고 대체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높은 성벽 속에 안주한 경향도 없지 않았다.

인문학의 위기 담론에는 인문학자들이 책임져야 할 부분도 적지 않다. 인문학자들이 대학과 학문이라고 하는 울타리 속에서 안주하면서 고답적인 연구에만 침잠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해 본다. 물론 이러한 자세가 학문 연구의 기본이라는 것은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지만, 그러한 전통적인 태도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저절로 대중들과 멀어져 가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인문학의 세계에 대하여 열어 보여주는 것에도 소홀하고 대중과의 소통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음으로써 인문학은 따분하고 고루한 자기들만의 학문이라는 그릇된 선입견을 심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인문주간의 슬로건을 ‘열림과 소통의 인문학’이라는 정한 것도 자기반성에서부터 출발하고자 하는 인문학자들의 이러한 모습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무관심에

학문후속세대 양성 어려움

인문학에 대한 국민들의 새로운 인식과 인문학의 부흥을 위한 인문학도들의 갈망에 다소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도 들린다. 지금 인문학계에서 떠드는 것은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자의 위기라는 것이다. 인문계열 학과의 폐과가 속출하고 인문학 지원 연구비가 태부족한 현실에 대한 어리광 정도로 치부하는 것이다. 이는 현재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인문학에 대한 담론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 문제로 제기된 인문학 담론의 본질에 대해서 무지한 것에 불과하다. 연구와 교육의 근간이 되는 대학의 학과가 살아남지 못하는 것 자체가 인문학의 쇠락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인문학과 인문학과로 구별하여 이분법적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인문학에 대한 정부와 사회적 무관심이 곧바로 학문후속세대 양성에 어려움을 주고, 인문학 연구의 후속세대가 엷어지면 이것은 자연히 인문학이 도태의 길로 가는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인문학과 인문학계로 구별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또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없는데 유별나게 한국에서 위기 국면을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이도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의 인문학은 학부 학생들의 교육에 중점을 두는 리버럴 아츠 칼리지(인문대학)가 2백17개나 될 만큼 든든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충분하고 다양한 교양과목을 이수함으로써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인재를 양성한다고 하는 확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미국의 대학들은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만큼 미국 대학에서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제도와 방법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유럽의 선진 국가들도 마찬가지이다. 프랑스는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사학·철학 등을 배우고 대학입학시험인 ‘바칼로레아’에는 철학적인 논술이 포함되어 있다.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는 그것이 현재로서는 수요가 없더라도 학문적 가치가 있다면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보호하고 있다.


인간  삶의 질 높이는 인문학

사회적 이해 필요


모든 학문의 지하수와 같은 인문학이 다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인문학 발전에 장애물이 되어온 요인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서 타개 방안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인문학이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활력소와 같은 것이라는 사회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대단히 편리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롭다고 해서 우리들의 삶의 가치까지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 문화적 풍요지수가 높아져가는 만큼 우리들의 삶의 행복지수를 향상시키는 생명수와 같은 역할을 인문학이 하고 있다는 인식을 해야 한다. 인문학이 사회 대중과 소통하는 일에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부 당국은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위해서 노력하고, 인문학 발전을 위한 직접적인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 연구 지원비를 말하는 것이 인문학도로서는 세속적으로 비쳐질 수 있지만 인문학 연구의 어려움 속에는 열악한 연구지원비도 큰 몫을 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공계는 교육인적자원부 이외에도 정보통신부나 산업자원부, 한국과학재단 등 다양한 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데 반하여, 인문학은 오직 교육부 산하의 한국학술진흥재단밖에 없다. 그나마 지급되는 연구비는, 2005년도를 예로 들며 전체 7조8천억 원 중에서 인문학은 5백56억 원으로 전체 0.7%에 해당하는 부끄러운 현실이다. 이와 같은 열악한 여건은 인문학도들로 하여금 극심한 자괴감에 빠지게 할 뿐만 아니라 결국 인문학의 연구 의지를 꺾는 현실이 되고 있다.

교육 정책에 있어서도 교육부는 당장 학부제를 폐지하고 학생 선발을 학과제로 환원해야 한다. 학부제를 통하여 학생들이 다양한 전공을 접하게 한다고 하는 당초의 취지는 허망한 이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미 드러난 상황이다. 결국 학생들은 자신 있게 자신의 전공 하나를 가지지 못한 채 얼치기 전공으로 졸업하고 있는 형편이며, 많은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유인하는 수단으로 학부제를 악용하고 있는 형편에 있다. 학과제를 주장한다고 해서 인문학을 해당 학문 중심으로만 하려고 한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인문학이 학과의 경계를 허물어서 학제적 연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도 아주 활발하게 여러 학문 간의 학제적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이제 학문을 시작하는 학생들은 먼저 자신의 전공을 충분히 익히고, 그러고 난 후에 필요에 따라서 다른 인접학문으로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 올바른 단계라는 것이다.

또한 인문학의 연구 영역을 넓혀가는 것도 인문학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이다. 지금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문화콘텐츠 구축도 인문학의 외연을 넓혀가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인문학을 기초로 하여 문화의 가치를 새롭게 재생산해 내는 노력을 이제는 우리들의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대학은 소비자의 욕구나 시장 논리에 휩쓸리지 말고 인문교육이 충실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하며, 인문학자들도 다른 학문과의 경계의 벽을 허물고 적극적인 소통과 융합의 길을 모색하면서 인문학이 가져야 하는 사회적 역할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윤평현 교수(국문·국어학)

인문대학장

전국국공립대학교 인문대학장 협의회 회장


 

 

 

 

 

 

 

사진: 지난달 26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인문주간’ 선포식에서 윤평현 교수(가운데)가 ‘오늘의 인문학을 위한 우리의 제언’을 발표하고 있다. 선포식에는 전국 인문대학장 50여명이 함께 참석했다.       

                                          (사진제공=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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