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사회 배울 무궁무진한 기회 잘 활용하길” “멀리서 찾아와준 후배들을 보니 시체실 30미터 전방에서 겁먹고 도망치던 예과시절의 추억이 엊그제처럼 새록새록 떠오른다”며 기자 한 명 한 명 악수를 청하는 서영석 동문.  

“선진사회 배울  무궁무진한 기회 잘 활용하길”

“멀리서 찾아와준 후배들을 보니 시체실 30미터 전방에서 겁먹고 도망치던 예과시절의 추억이 엊그제처럼 새록새록 떠오른다”며 기자 한 명 한 명 악수를 청하는 서영석 동문.

우리 대학 의과대학 61학번 출신인 그는 졸업 후 공군 군의관 3년 복무, 대학병원, 전주보건소에서 각각 1년 동안 인턴활동으로 경험을 쌓고, 72년에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현재 LA CHA병원과 세인트 빈센트 병원에서 마취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

미국의 선진의학을 배워와 70년대 당시 수준 낮은 한국의학기술을 발전시키겠다는 야망을 품고 유학길에 올랐던 서 동문을 미국사회에 정착하게 만든 것은 ‘베트남 전쟁의 발발’이었다고 한다. 그는 “미국의 베트남 참전으로 인해 미국사회의 의사 수가 급격히 감소해갔다”면서 “까다로웠던 영주권발급이 의학 분야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완화되었기 때문에 뉴욕에서 6개월의 레지던트를 마치고 영주권을 얻어 미시간 ‘Wyandotte Center 병원’에서 첫 일자리를 구했다”고 말했다.

외국에 대한 동경이 컸던 대학시절, 미국과 스웨덴 친구와의 펜팔, 미국선교사와 이른 아침 새벽 성경공부를 통해 부지런히 영어실력을 갈고 닦았던 서 동문이지만 ‘언어장벽’ 때문에 첫 외국생활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려고 흑인웨이터에게 ‘Hey’하고 불렀더니 그가 몹시 불쾌하고 화난 듯이 쳐다봐 겁먹었던 경험, 병원 스피커에서 서 동문을 찾는 방송이 나와도 전혀 알아듣지 못해 옆의 간호사가 가르쳐 줘 겨우 알 수 있었던 경험 등 …

그는 “병원의료는 조금만 실수해도 큰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정확히 알아야 하는데, 스피커나 전화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좀처럼 알아듣기가 어려웠다”며 “내용을 직접 가서 확인하기 위해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엘리베이터를 두고  하루에도 수십 번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했었다”면서 힘들었던 지난날의 시간들을 한바탕 웃음으로 가볍게 승화시킨다.

한편 대학시절의 낭만을 제대로 즐기지 못해 많이 아쉽다는 서 동문은 “학점공포가 심해 놀고 있어도 늘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면서 “시험을 다 끝내고 방학을 즐기는 타과 학생들에 반해, 의대는 시험이 자주 연기되어 방학기간에도 시험공부를 해야만 하는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많았다”고 했다. 

전북 김제가 고향인 서 동문에게 광주라는 매우 낯선 타지 대학생활은 일년이라는 긴 적응기를 필요로 했다. 갓 입학한 새내기 시절 타 지역학생들에 대한 전남지역 학생들의 텃새를 심하게 느끼고 있던 그해 5월 어머니의 죽음은 그를 더욱 외롭고 힘들게 했다. 다행히 ‘이리고등학교’출신 5명의 선배들로부터 많은 위안을 받으면서 정신적인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밝히는 그는 잠시 지난 추억에 젖어 이야기를 멈추다 다시 이어갔다.

서 동문은 “예과 2학년 시절 U.B.F 선교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수련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타지 사람들과 활발히 교류할 수 있었다”면서 또한 “의대 동아리 MS(Medical society)활동도 했는데, 방학 때면 의사가 없는 서해안의 섬마을로 의료봉사를 하면서 뜻 깊은 시간을 많이 가졌다”며 동아리 활동이 대학시절에 가장 남는 추억인 것 같다고 말했다.

평소에 ‘덕이 있는 자는 외롭지 않다’라는 의미의 덕불고(德不孤)를 좌우명으로 가슴에 새기고 덕을 실천하기 위해 늘 노력하고 있다는 서 동문. 그는 “언젠가 우연히 흘려들은 간단한 말인데 가슴에 와 닿았다”며 “지금껏 덕을 많이 못 쌓고 살아온 것 같아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외국에서 살면서 안창호 선생의 ‘애국, 애족, 근면, 정직, 성실’의 5가지 정신에 충분히 공감하고 아이들과 함께 실천하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고국의 좋은 교육혜택으로 인해 오늘날 미국에서 마취과 의사로서 성공할 수 있었다고 겸손하게 말하는 서 동문은 후배들을 통해 전남대가 질적으로 성장해 전국 상위대학 10위권 안에 포함된다는 소식을 들을 때 마다 강한 자부심이 느껴진다고 밝혔다. 그러나 후배들의 미국진출이 활발했던 80년대와 달리, 해가 거듭할수록 미국지역에 거주하는 동문들을 찾기 어렵다고 했다.

전 LA한인회장과 현재 미주 한인 총 연합회 수석 부회장인 서 동문은 “LA만 하더라도 서울의 이름모를 대학 동창회는 날로 번창해 가는 것에 반해 우리 대학 동창회는 점차 규모가 축소되고 있다”면서 “선진사회의 지혜, 지식, 기술 들을 배울 수 있는 무궁무진한 기회들을 후배들이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아쉬움을 표현했다. 그는 또 “이민 초창기에 비해 한국인에 대한 ‘근면·성실’의 긍정적인 이미지가 미국사회에 널리 확산되어 있다”며 건강식품으로서의 높이 평가받는 김치의 우수성, 한국 드라마의 폭발적인 인기, 월드컵 때 보여준 응원문화 등은 한국의 이미지를 한 단계 높이는 데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부심이 너무 강하면 자칫 교만으로 빠질 수 있다”면서 “자부심은 갖되 겸손한 자세를 갖춰 교만을 항상 경계하라”고 후배들에게 진심어린 메시지를 남겼다.

/노은빈 기자 kokohak@hanmail.net



서영석 동문은…


▶1967년 의과대학 졸업

▶1975년 뉴욕 Brooklyn Jewish Hospital Medical Center인턴,

    마취 residency수료

▶1977년 미시간 주 Wyandotte Center 근무

▶1987년 남가주 한인 마취과 의사회 회장

▶  현재 LA   St.빈센트 안과 수술 센터 마취과 과장

▶  미주 한인 총 연합회 수석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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