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진홍빛 한복을 차려입은 할머니가 액자의 모퉁이를 쓰다듬으며 사회교육원의 그림전시회를 둘러보고 있다. 전시회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못다핀 꽃’을 그린 김순덕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그림과 새로운 인생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문제가 언론에서 주목되기 시작한 90년대 초반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면서 시작한다. 당시 할머니는 내일은 꼭 신고해야지 하다가도 자식들이 놀랄 걱정에 아침이 되면 망설이며 몇 달을 보냈다. 순탄하게 살아온 몇십 년을 포기한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가족들의 만류도 신고 이틀만에 ’나눔의 집’에서 시작하는 할머니의 새 인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우리로 끝나야지 후세에 이런 일이 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할머니로 하여금 이렇게 강한 힘을 내도록 했으리라.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가 된 사연도 기가 막히다. 할머니는 처녀공출이 시작되면서 시집간 언니와 어린 동생 대신 "일본에 간호원으로 간다"는 말을 들으며 고향인 경남 어령을 떠나야 했다. 그런 할머니와 많은 처녀들이 도착한 곳은 중국 남경. 시뻘건 강물과 시체 위에 시체가 뒤덮인 참담한 현실 앞에서 울부짖던 처녀들은 초토화된 마을에 노란 천막을 치고 그 안에 한 명씩 나뉘어 들어가야 했단다. 그리고 수만 명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던 당시를 "수도 없이 많은 처녀들이 목매달아 죽었다"고 기억한다. 높은 자리의 군인에게 불려갔던 할머니도 "더 이상 이렇게는 살수가 없다" 했는데 그 군인이 자신을 포함한 다섯 명의 처녀들을 위해 서류를 만들어 줘 전쟁 중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가 17살에 공출돼 끌려간지 3년 만인 20살 때였다.
"가까운 일은 기억 못해도 옛일은 왜이리 생생한지 모르겠다"는 할머니의 상흔은 쉽게 지워지지 못한다. 특히나 그곳에서 하혈을 하며 고통스러울 때 일본인이 건넨 ’중국 군인의 다리를 잘라 고아 만든 약’을 먹은 기억은 지금도 악몽에 시달릴 만큼 끔찍한 것이다.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 삶의 고달픔에 대한 물음에 단호하게 "백번 천번 잘 했다는 생각이다"고 말하는 할머니.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피해자의 실체를 알리는 노력을 계속하며 "우리로 끝나야 하는 역사, 다시는 되풀이 되서는 안 될 역사이기에 더 열심히 싸울 것이다"고 확신을 다져간다. 처음엔 열 사람도 안됐던 일본대사관 앞의 ’수요집회’가 이제는 수백 명이 되어가고 있음에 힘을 얻고 있지만 아직도 흔들림 없는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이라는 목표를 향한 발걸음은 쉬이 멈출 수가 없다.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할 것이다"는 할머니의 이 발걸음에 "학생들을 비롯해 전국민이 같은 마음으로 한다면 훨씬 힘이 될 것이다"고 많은 이들의 관심과 참여를 당부했다.

백지선 기자 kindplan@hanmail.net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