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이 ‘창조성’을 발휘 한다예술가 중에는 유달리 괴팍한 성격이 많다. 그들의 성격이 괴팍해서 가족과 친구에게 고통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 자신도 고립되어 고통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과 정치, 시와 예술에 특출 난 사람은 모두 우울증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류는 그들의 고통에 빚을 지고 있다.  

우울증이 ‘창조성’을 발휘 한다


예술가 중에는 유달리 괴팍한 성격이 많다. 그들의 성격이 괴팍해서 가족과 친구에게 고통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 자신도 고립되어 고통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과 정치, 시와 예술에 특출 난 사람은 모두 우울증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류는 그들의 고통에 빚을 지고 있다.

그 동안 창조성과 정신병의 관계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어왔다. 조울 정신병 환자들의 직계가족 중 23%에서 창조성이 입증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창조적인 사람들에게서 조울 정신병과 기분장애의 발현율이 높으며, 그들의 직계가족에서는 이러한 질병의 유병율이 훨씬 높은 것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질병의 발병이 바늘 끝보다도 예민한 그들의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천재성이 광기 때문에 나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많다.

고흐는 천재적인 화가였지만 우울증으로 자살했다. 그는 성격적으로 괴팍하고 자학적이었다. 자존심이 세고 공격적이었으며 타협을 몰랐다. 이런 성격이 그를 고립과 가난으로 몰고 갔다. 인생의 고통 속에서 그는 그림을 발견했다. 심리적인 아픔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실생활은 비참했지만 그의 그림들은 아름답다. 심리적 고통을 예술로 표현하는 능력을 그는 타고 났다. 그러나 현실의 벽에 부딪혀서 그는 자살하고 만다. 고흐의 인생과 성격을 그의 창작활동과 관련 지어 정신분석적인 측면에서 설명해 보겠다.

고흐는 27세에 미술을 시작하여 37살에 자살하기 까지 불과 10년간 850여 점의 창조적인 미술 작품을 그렸다. 그의 그림은 아름다워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은 외롭고 불행했다. 그는 매달 동생 테오가 보내주는 생활비로 연명하는 경제적인 무능력자였다.

고흐는 성격이 괴팍하고 자기주장을 굽힐 줄 몰라서 주변 사람들과 늘 싸웠다. 그의 아버지목사님은 그를 ‘너무 세게 짖어대는 무뚝뚝하고 커다란 개’와 같다고 했다. 파리 생활 중에는 동생 테오의 집에서 살았는데 형을 그렇게도 사랑했던 테오도 “이제 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아무도 우리 집을 찾아오지 않게 됐다. 누구든 오기만 하면 형과 싸움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형이 떠나 주었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였다. 고흐는 인상파 화가들 중 절름발이였던 ‘로트렉’과는 싸우지 않았지만 그 외의 화가들을 ‘인간적으로 구역질나는 화가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을 피해 그는 결국 남불 아를르로 떠났다.

고흐는 유난히도 동정심이 많았다. 보리나주의 탄광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할 때는 불쌍하고 가난한 광부들에게 자기 메트리스와 빵을 나눠주고 자신은 거의 거지처럼 살았다. 또한 고흐는 농부와 가난한 사람들을 각별히 사랑했다. 그의 그림 중에 ‘감자 먹는 사람들’ 이라는 작품이 있다. 가난한 농부 가족이 호롱불 밑에서 거친 손으로 감자를 먹는 장면이다. 그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들이 지은 감자를 먹는 농부들의 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라고 감탄하고 있다. 그는 가난한 농부들을 많이 그렸다.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돌보는 천사 역할은 죄책감이 많은 사람들이 선호한다. 내적 죄책감에 의한 처벌 불안을 피할 수 있는 면죄부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한 자들은 고흐를 공격할 힘이 없어서 적대시 할 필요 없는 안전한 대상들이기도 했다. 약하고 가난한 자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고흐는 자학적이었다. 신학 공부를 하다가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게으른 자신을 벌주었다. 자신을 채찍으로 때리고 추운 겨울에 맨바닥에서 잤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최고의 미덕으로 보았다. 그의 그림에 ‘위대한 여인’이라는 작품이 있다. 젖이 축 늘어진 늙은 창녀 지엥을 그린 것이다.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편지 했다. “토마스 후드의 시에 양심의 가책으로 잠을 못 이루는 부잣집 부인의 얘기가 나온다. 그 여인은 옷을 사러 갔다가 가난하고 결핵으로 창백한 여자 재봉사를 보았다. 부인은 자신이 호의호식하는 것이 부끄러워서 잠을 못 이루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그림은 그 여인을 표현한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을 위대한 사람으로 보는 고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잘 살고 거만한 사람들을 혐오했다. 대신에 고통 받는 약자들을 동정했다. 쾌락은 외면하고 고통 쪽을 좋아했다. 자학적이고 자기 처벌적인 성격이다. 이것은 고흐의 성격 중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 것이 그의 우울의 원인이었고 마침내 그를 자살로 몰고 갔다.


고흐의 아를르 생활과 정신병의 발병


고흐의 아를르 생활은 35세에 시작 되었다. 1년 3개월 동안에 190점의 유화를 그렸다. 아를르에서 빈센트는 창작생활의 절정을 이루었다. 고흐는 고갱을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토론이 과열 되어 고흐와 고갱은 마찰을 빚었고 갈등 끝에 고흐는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고흐의 담당의사는 레이(Rey)의 진단은 간질이었으나 그는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시골 의사여서 의무기록은 부실하고 진단도 애매했다.

고흐의 증상은 사람들이 비난하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리고, 피해망상이 있었다. 자신을 때리며 뒹구는 행동 장애도 있었다. 증상은 발작처럼 삽화적으로 왔고 1~2주 만에 끝나면 곧 정상을 회복하여 정상적인 창작 작업을 하였다. 의식의 장애는 없었다(Hemphill 1961). 고흐의 병에 대해서는 정신분열증, 조울 정신병, 알콜성 정신병, 납 중독증 (납이든 물감을 먹어서) 등 많은 논란이 있으나 적절한 진단명은 없다. 한 인간을 환자로 정의 내리고 진단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Monroe 1978).

정신 역동적 진단(dynamic diagnosis)을 내린다면 그의 증상들은 가혹한 내적 대상의 투사로 설명할 수 있다. 환청은 내적 대상의 비난의 소리였고, 피해망상도 내적대상의 투사에 의한 것이다. 우울발작과 죄책감 그리고 자해행위는 자기 처벌적인 행위로 볼 수 있겠다.


고흐의 창작활동과 정신병 발작의 관계


사실 고흐는 제대로 미술 교육을 받은 일이 없다. 그는 엄격한 칼빈주의 목사인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다가 11살 때 처음으로 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15살 까지 4년간 학교에 다녔다. 이것이 그가 받은 공교육의 전부이다. 미술 교육은 2-3개월 씩 모베와 라파포트에게 받은 것이 전부 였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아름답고 그는 천부의 화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천재성은 교육에 의한 것이 아니다. 노력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타고난 천재성이 있었다. 이것을 자아가 이용한 것이다. 때로는 자기 위로의 도구로 이용하였다. 프로이트도 “예술가의 천재성은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정신분석은 그에 대해서 할 말이 없다. 다만 창조성이 예술적으로 표현되는 과정과 방식에 유년기 경험과 자아가 관여하기 때문에 이것에 정신분석은 관심을 기울인다”고 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그림을 시작한 후 약 10년 동안에 1천5백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그중 유화가 870 여점이다. 이 중 463점을 마지막 2년 6개월 동안에 그렸다. 이 시기는 아를르에서 정신병이 발병하여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갇혀 살았던 1년간과 오베르에서 살던 마지막 2개월을 포함한다. 아를르에서는 우울발작의 기간을 빼면 이틀에 한점 꼴로 창작을 했으며, 생레미 정신병원에서는 발작 기간과 그림 금지 기간을 빼면 3일에 두 점 꼴로 그렸다. 오베르에서는 2개월간 80점을 그렸다. 매일 한점 이상을 그린 셈이다. 고독감과 우울이 심해질수록 그는 더 많은 그림을 그렸다. 예술의 자기 위로 기능을 보여 준다(Esman 1951/Pollock 1978). 그리고 그가 정신분열증 환자였다면 이런 창작 활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울과 창작활동의 관계에 대하여 김혜남은 대상을 잃고 공허해진 마음의 공간을 예술작품으로 채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것도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예술 작품으로 복구하는 것이다.

고흐의 아버지는 고흐가 32세 되던 해에 갑자기 돌아 가셨다. 빈센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림에 더욱 몰두했다.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 달인 4월부터 5월 사이에 대작인 <감자를 먹는 사람들potato eater>을 완성했고, 6월에는 <농사꾼 아낙네의 얼굴>을 그렸다. 이 해부터 빈센트는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렘부란트와 더불어 빈센트도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 중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화가가 자화상을 그릴 때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고 싶을 때이다. 아버지의 죽음 후에 빈센트가 자화상을 그린 것은, 마음속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구성하는 노력이었을 지도 모른다(Silverman 1985).

실제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빈센트의 창작활동이 더욱 활발해 졌다. 아버지의 죽음과 창작 활동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Pollock(1987)은 '애도 후에 오는 자유로움(mourning liberation)'에 대해서 썼다. 대상을 상실한 후에 심리적으로 자유로워 저서 창조적이 된다는 주장이다. 어떤 대상을 상실했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예술가들의 생애를 분석해 볼 때 대상의 상실이 꼭 병적이거나 나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창조적이 되게 하였다. 또한 Pollock은  “예술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은 형제가 죽으면 창조성이 발휘된다. 상실한 빈 자리를 예술로 대치하는 것이다. 슬픔의 치유과정으로 예술이 이용 된다”고 하였다 (Pollock 1978). 죽은 형제나 부모가 떠나고 마음속에 생긴 공백을 그림이나 예술이 채워 주는 것이다. 그리고 내적 대상이 죽음으로 해방감을 얻을 수도 있다. 고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해 그의 그림의 색상이 밝아지고 창조적이 되었는데 이것을 미술사가들은 파리에서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겠지만, 아버지 사망으로 얻은 빈센트의 심리내적 변화와 해방감이 더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

빈센트는 발작기간 동안은 그림을 그리지 못했고, 발작이 지나가면 창조적이 되었다. Lubin(1972)은 빈센트의 예술적 성공은 심리적 갈등을 창조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재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발작 후에 고흐는 “긴장 되고 마음속에서 새로운 느낌이 올라오며, 작품구상이 벌떼 같이 몰려온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고, 주체하기 어려운 감정과 정열이 솟아오른다. 작품이 꿈에서도 나타난다”고 밝힌다.


우울증에서 벗어나면 남다른 창조성 발휘


빈센트의 내적 갈등과 창작활동이 관계가 있었다고 본다. 그의 내면세계를 정신분석적 입장에서 분석해 본다면 도덕적 아버지 (가혹한 초자아)의 압력에 지친 어린 빈센트가 아버지를 미워하고 두려워하며 자책하고 있다. 내적 긴장이 참을 수 없이 높아졌을 때 발작적으로 우울발작이 왔을 것이다. 자학적이고 피해망상적인 환청과 망상은 내면에서 들리는 내적 권위자의 비난의 소리를 투사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발작기간 동안 고통스럽지만 그는 이 대상에게 자기 분노와 공격성을 쏟아 버리고 발산했던 것 같다. 억눌린 분노와 공격성이 발산되고 나면 어느 정도 갈등과 긴장이 풀리고 정신은 평온을 되찾는다. 그리고 내적 갈등과의 싸움에 소모되고 있던 정신에너지가 풀리고 풍부해 져서 자아는 창조적이 된다. 벌떼처럼 창조적인 영감이 몰려왔다는 고흐의 글이 이것을 입증해 준다(Pollock 1994).

고흐는 천재적인 화가였다. 그의 성격은 자학적이고 동정심이 많았다. 이런 성격이 그를 우울하고 고립적인 생활로 이끌었다. 이런 우울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고흐는 그림을 그렸다. 고흐는 우울하고 공허한 내면을 작품으로 채웠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그림으로 공허한 내면을 복구했다. 내면세계에서 그를 짓누르는 권위상인 아버지와 투쟁하며 그는 살았다. 이 싸움이 극에 달할 때는 발작을 일으켰다. 그의 적개심이 병 상태에서 발산 된 후에 그는 내적 평화를 얻는다. 이때 작품에 대한 의욕과 영감이 벌떼처럼 밀려들었다. 실제로 발작 후에 그는 병원에서 많은 그림을 그렸다.

테오는 그의 전이 대상이었다. 테오가 그의 그림을  인정해 준 것은 유년기 아버지의 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고흐는 신이 나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러나 테오에게 가족이 따로 생기고 아들까지 낳자 그는 심리적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림으로도 채울 수 없는 절망이었다. 그리고 고흐는 자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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