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먼저 주제와 관련된 ‘히브리’(Hebrew)라는 용어를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Hebrew’는 ‘habiru’ 혹은 ‘hapiru’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이들 사이의 어떤 상관성 유무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학자는 고대 수메르의 수도 우르(Ur)에 거주하던 셈족어를 사용한 부족이었다고 하며, 또 어떤 학자는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고도 한다. 그런가 하면 유대교의 한 사전에 의하면 ‘Hebrew’는 ‘ever’ 즉 “강을 건너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요단강을 건너온 아브라함을 지칭한다고 적혀 있다. 어떠하든 본고에서는 히브리, 유대인, 이스라엘 사람을 같은 개념으로 보고 글을 전개하겠다.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그것을 서양세계에 전해준 민족으로 소위 히브리(Hebrew)민족을 들 수 있다. 히브리민족은 이스라엘 또는 유대인이라고 불리는 민족으로서 남부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방에 기원전 2590년경부터 정착하게 되었다.

  아브라함(Abraham)이 히브리 이주민 전체의 족장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전형적인 족장(Patriarch)이었음에는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버지 데라(Terah)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장사꾼인데다 다신론자였으나 아브라함은 개인의 종교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아버지와는 달리 유일한 수호신을 신앙하게 되었다. 당시 다신론에서 유일신에로의 변혁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상응하는 결단이었을 것이다. 유일신의 이름은 엘-샤다이(El-Shaddai)로서 그 신은 나무나 돌로 상징되는 테라핌(teraphim) 등의 조상신이나 가내신(家內神) 보다는 월등히 우월한 존재였다. 엘-샤다이가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Isaac)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했을 때, 결국에는 양을 대신 바치기는 했지만, 아브라함은 이 명령을 그대로 따르고자 했었다. 이 이야기는 고대 인신공희의 관습이 동물공희로 대체되는 과정을 반영한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는 그의 아들 이삭과 야곱(Jacob)이 아브라함의 뒤를 이어 부족을 이끌었으며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름이 곧 이스라엘의 열두 종족의 이름이 되었던 것이다.야곱의 아들 요셉(Joseph)이 이집트 대상(隊商)에게 팔려가 온갖 고생 끝에 성실성을 인정받아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된 후 이집트에서의 이스라엘인은 150여 년 동안 이집트인과 마찬가지의 지위를 누리고 살았다. 그러나 그 후 람세스 2세(Ramses Ⅱ, 기원전 1304~1237)가 왕위에 오르고 새로운 도시 건설과 웅장한 사원 건립을 위한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이게 되었을 때, 람세스 2세는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도 징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자 북서쪽의 변경 지대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인에게 눈을 돌리고 그들을 노예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스라엘인은 채찍의 감시아래 파라오(Pharaoh)의 공공사업에 강제로 끌려 나갔다. 민중 신학자 서남동은 이들을 히브리(Hebrew)의 어원인 하비루(Habiru)로 보았다. 이렇게 참혹한 곤궁에서 그들을 구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집트 전역을 휩쓰는 천재지변이나 아니면 이스라엘 민족의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적어도 이 두 가지 희망 가운데 하나가 실현된 것이다. 왜냐하면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 모세에 의해 출애굽(Exodus)이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모세가 광야를 지나 호렙산(Mt. Horeb)에 갔을 때 거기에서 모세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건져 내어라.” 이때 모세가 하느님에게 아뢰었다. “백성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여야 하겠습니까?" 모세의 질문에 대한 신의 대답은 모세는 물론이고 현대 학자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신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I am that I am).” 라고 말하였다. 야웨(YHWH=Yahweh)라는 신의 이름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 이름이 영국인들에 의해 잘못 표기되어 Jehovah(여호와)로 전해지고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인에게 ‘야웨’에 대한 숭배 의식을 처음으로 소개하였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유대인에게 이 이름은 너무 성스러워서 입에 올릴 수조차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경전을 읽을 때도 야웨 대신 우회적으로 ‘아도나이’(나의 주)로 불렀다. 모세의 지도력이 이스라엘 종교를 다신교(polytheism)에서 유일신교(monotheism)로 전환시켰다는 사실은 문화사적으로나 종교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모세 이후 이스라엘의 종족이 가나안을 장악하며, 기원전 1200년경에 이르면 이미 그 지역의 상당한 부분이 그들 휘하에 들어간다. 결국에는 왕국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두 번째 왕인 다윗(David)은 예루살렘을 손에 넣어 수도로 삼는다. 그가 예루살렘에 성전(Temple)을 세울 계획을 세웠고 그의 아들 솔로몬(Solomon, 965~925)이 그 계획의 실행을 완수하였다. 그러나 솔로몬이 죽은 뒤 정치권력에 분열이 일어나 북왕조와 남왕조로 분단되었다. 북은 이스라엘(Israel)이라 불렀고 남은 유다(Judah)라 불렀다. 이후 이스라엘은 수메르인들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며, 바빌론의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 왕의 통치에 휩쓸리고, 이어서 페르시아의 통치에 들어가는 등 격동을 견디지 못하고 쇠망한다.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의 고레스(Cyrus)왕은 바빌론을 정복한 후 포로가 된 이스라엘인들에게 유화정책을 썼으며 심지어 그들이 고국인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도 허락하였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맨 처음 한 일은 황폐한 사원에 제단을 만드는 일이었으며 얼마 되지 않아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신앙과 영도력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기에 이르렀다. 그 뒤 유대교를 이끌어간 사람들은 랍비(Rabbi)들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유대교는 성전중심의 종교에서 회당종교로 변모하게 된다.

  신정 정치를 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은 기원전 322년에 그리이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소아시아와 시리아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몰아내고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삼기 위해서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더 사망 이후 팔레스타인은 시리아와 이집트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시리아의 승리로 헬레니즘이 무척 강화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에 대해 유대인의 반발이 심했으며 그 뒤 혼란이 거듭되다가 이스라엘은 결국 로마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서기 70년에는 예루살렘 제2성전이 비참하게 패망하게 되었고 73년에는 팔레스타인 전체가 완전히 정복되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1948년 독립할 때까지 약 1900년 동안 디아스포라(Diaspora)의 삶을 살아야 했다. 디아스포라가 된 유대인들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회당을 통해 토라(Torah)와 탈무드의 가르침을 받아 신앙과 민족의 정체성(언어와 교육)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랍비들의 공적이 무엇보다도 컸지만 랍비들 외에 마이모니데스(Moses Maimonides), 멘델스죤(Moses Mendelssohn)같은 대철학자가 나타나 민족정신을 고취시켰고 또 중세 때에는 카발리즘(Kabbalism)이라는 신비주의 사상이 나타나 민족혼을 불러 일으켰고 그것이 하시디즘(Hasidism)으로 이어졌으며 마침내는 시오니즘(Zionism) 운동이 전개되어 국가를 되찾는 (1948.5.15)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히브리인의 세계문화사적 의의는 무엇보다도 유일신 신앙(Monotheism)을 고수한데서 찾을 수 있다. 원래 히브리 종교는 다신교(Polytheism)였으나 민족적 수난을 체험하면서 유일한 수호신을 생각하여 그들의 관념에서의 야웨(YHWH)를 유일화하고 히브리인 자신은 유일한 야웨의 선민이라고 자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신념을 체계화한 것이 이른바 유대교(Judaism)인데 이는 위로는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아래로는 그리스도교(Christianity)와 이슬람(Islam)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들의 경전인 테나크(Tenakh)는 구약성서라는 이름으로 전체 내용 그대로 고스란히 그리스도교의 경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슬람의 코란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 내용의 많은 부분이 그대로 코란경에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유대인들은 창조를 기념하고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을 기억하기 위해 안식일(Sabbath)을 지킨다. 안식일 엄수의 배경은 야웨가 창조한 공간도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은 더욱 중요하다는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안식일의 주된 의식은 회당예배에서 토라의 성구를 읽는 것이다. 경건한 유대인은 일주일 내내 안식일을 기다리며 보낸다. 이 기다림이 일상의 나날을 값있게 해준다.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때 시작되어 토요일 밤 별 세 개가 떠오를 때 끝난다. 안식일 예배에는 토라와 예언서의 공중 독서, 그리고 옛적 안식일에 행하던 성전 희생제를 기념하는 의식이 포함된다. 인간이 일상의 틀로부터 휴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유대 전통만의 발견은 아니다. 그렇지만 일상의 보폭(pace)을 바꾸는 행위가 영적 실존의 핵심과 중심이 되는 것은 유대 전통만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요소이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안식일 제도는 온 세계에 전파되어 이모저모로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모세가 받은 613개의 계명(Mitzvah) 중 태양력의 날 수와 같은 365개는 부정적인 계명이고, 인간 신체의 각 부분에 상응하는 248개는 긍정적인 계명이다. 이사야는 이것을 여섯 개로 축소시켰다(이사야 33:15-16). ① 의롭게 살고 ②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 ③ 착취한 재물은 가증히 여기고 ④ 뇌물은 마다고 뿌리치며 ⑤ 피 흘리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 귀를 막고 ⑥ 악을 보지 않으려 눈을 감는 사람. 아모스는 다음과 같은 한 마디 말로 줄였다(아모스 5:4). “나를 찾으라, 그러면 살리라.” 더 나아가 하박국은 그것들을 다음과 같은 한 마디에 실었다(하박국 2:4). “의인은 믿음으로써 살리라.” 나중에 그리스도교의 창시자 예수는 이것을 두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이와 같은 내용을 고려해서인지 현대의 종교학자들은 유대교를 한마디로 ‘윤리적 유일신교’(ethical monotheism)라고 규정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히브리인들은 이 지구상의 인간들에게 삶의 중핵적 방식으로서의 윤리를 가르쳐 준 셈이다.

  유대인의 역사는 박해, 학살, 천대, 추방 등으로 얼룩져 있다. 단적인 예로서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히틀러가 이끌던 나치정권에 의해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는 홀로코스트(Holocaust)를 들 수 있다. 유대인들의 신앙이 아무리 굳건하다 하더라도 이러한 와중에서는 야웨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모든 환란을 자신들의 죄의 탓으로 돌리고 회개하며 필경 야웨는 자신들을 도와주고 구원해 줄 것으로 믿는 것이다. 여기서 히브리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의 한 구절을 소개하겠다. “밝은 빛을 따라서 앞으로만 나가자. 내 마음을 지키며 앞으로만 나가자. 주와 함께 걸으면 걱정할 게 무어냐. 갈 길이 멀고 험해도 노래하며 나가자.” 이 끈질긴 믿음의 전통이 그리스도교, 이슬람에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인류 역사 및 세계 종교사에 미친 그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한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은 기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린도전서 1:22~23) 라는 사도 바울(St. Paul)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히브리(유대), 그리스(헬라), 그리스도교(기독교)의 독특성을 엿볼 수 있다. 이 진술은, 히브리인들은 종교적이며 헬라인은 철학적이며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도라는 인물 메시아신앙에 역점을 둔다는 사실을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울의 진술이 아니라 하더라도 세계 문화사에서 히브리인들의 가장 큰 업적은 ‘종교’를 전해준 사실에 있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김영태 (윤리교육과 교수, 종교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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