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위대한 ‘수메르 연구자’ 중의 한 사람인 크레이머(S.M. Kramer)는 1956년, 수메르에서 발견된 수많은 문명사적 유산을 종합적으로 점검한 저서를 내놓았다. 그가 쓴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의 목차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는데, 크레이머는 여기에서 거의 40개의 장에 걸쳐 수메르 문명이 생산해 낸 인류 ‘최초의 것들’을 열거하고 고증하고 있다. 최초의 학교, 최초의 우주론, 최초의 양원제 정치 제도, 최초의 역사서, 최초의 의학서, 최초의 농업서, 최초의 격언, 최초의 문학 논쟁, 최초의 도서관 목록, 최초의 법전과 사회 개혁, 최초의 농업, 심지어는 최초의 세계 평화를 위한 노력의 흔적 등 많은 인류 ‘최초의 것들’이 수메르 문명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 인류의 문명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시작된 문명은 어떻게 발전되어 온 것일까. 20세기 이전부터 많은 고고학적 탐험가들은 이러한 문명의 화두에 이끌려져 있었다. 일찍이 문명의 시원을 이집트라고 간파한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에서부터 19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근동 지역의 여러 발굴단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관심과 활동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유럽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문명이 그리스와 로마의 선물이라고 믿어 왔다. 그러나 그리스 학자들 스스로는 자신들의 문명이 ‘보다 앞선 다른 문명의 기원’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지적하곤 했다. 그 앞선 문명이 바로 이집트 문명이라는 것이었다. 1799년 나폴레옹의 수행 장교에 의해 이집트의 로제타에서 발견되고 후에 판독된 ‘로제타 스톤’의 이른바 설형문자(상형문자와는 다른)의 기록과 뒤이은 이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들을 통해 유럽 사람들은 그리스 문명이 탄생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이집트에 발달한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이집트의 여러 기록들은 기원전 3100년 경에 시작되는 왕조에 이르기까지 언급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리스 문명의 시작보다 2천년이나 앞서는 것이었다. 기원전 4~5세기 경에야 절정기에 이른 그리스 문명은 인류 문명의 선두 주자가 아니라 오히려 훨씬 뒤늦은 후발 문명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집트가 인류 문명의 시원인 것인가? 그리고 더 나아가 이집트 문명이 그리스 문명을 낳은 것인가? 언뜻 그럴 듯하지만 19세기 말의 여러 고고학적 발굴들은 이러한 질문을 강력히 부정하게 만들었다. 앞서 말한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와 같은 학자들이 이집트를 자주 방문하고 그 문명에 감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스 문명의 원천은 이집트가 아닌 다른 곳이었다. 크레타 섬의 미노아 문명이나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 문명 등 그리스 초기 문명의 기원이 이집트가 아닌 근동 지역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근동 지역의 고대 문명이 시리아와 아나톨리아(지금의 터키 땅)를 통해 전파되었던 것이다.

근동 지역의 문명은 흔히 일컬어져 왔듯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어떤 고고학자들도 현생 인류의 출현이나 최초의 호모사피엔스로서 ‘크로마뇽인’의 갑작스러운 문명에 대해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그 문명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그곳은 ‘두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을 지닌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로 불리는 근동 지역이다.

동쪽으로는 현재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 지역인 자그로스(Zagros) 산맥과 닿아 있고, 북쪽으로는 아라라트(Ararat) 산과 타우로스(Taurus) 산맥까지 펼쳐졌으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시리아와 레바논, 이스라엘의 구릉 지대로 이어진 초승달 모양의 고지와 산악지대, 이곳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땅을 성서는 에덴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곳은 이스라엘의 동쪽이었다. 그곳은 네 개의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중 두 강이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이었다. 다른 두 강은 비손과 기혼 강으로 기록되었지만 오늘날엔 그것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농업은 현생 인류가 초기 원시적인 문명을 열었던 근동의 산악 지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퍼졌다는 것이 사실로 공인되어 있다. 또한 방사성 탄소 열대 측정법과 식물에 대한 발생학적 연구를 통해 인간이 맨 처음 재배한 농산물이 ‘보리’와 ‘밀’이었다는 것에 의견 일치를 보이고 있다. 인간이 야생 식물을 개량하고 재배하는 기술을 점진적으로 습득했을 것이라고 믿는 학자들은 근동 지역이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인도되는 거대한 식물 유전자 실험실이었던 것처럼 많은 재배종을 연속적으로 만들어 낸 것에 놀라움을 표시한다. 가령 포도가 시리아, 팔레스타인과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산간 지역에서 처음 재배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대홍수가 끝나고 아라라트 산에 방주가 멈춘 다음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구약의 기록도 우연한 것은 아니다. 포도뿐만 아니라 사과, 배, 무화과, 아몬드, 호두 등의 과일도 모두 이곳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사실도 이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창, 2: 8-9)


성서 기록자는 이 근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과일 생산의 발원지임을 확인해준다. 이 두 강 사이의 땅, 메소포타미아에서 보리와 밀을 경작하고 포도, 사과나무를 재배한 최초의 농부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수메르인(Sumerians)이었다. 이들이 가꾸어 놓은 비옥한 땅을 이후 아모리인, 아시리아인, 아카드인, 칼데아인, 그리고 카시드인과 페르시아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동족의 이방인들이 침투하여 할거했지만 이들 이방인들은 모두 수메르인이 일구어 놓은 문명의 답습자들에 다름아니었다.

기원전 3500년 경에 티그리스인, 유프라테스 계곡 하류에 정착했던 수메르인의 정확한 발원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중앙아시아의 고원 지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사용한 언어는 오늘까지 알려진 지구상의 어떤 언어와도 연관이 없는 독특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원주민은 이미 신석기 문화의 단계를 넘어선 불가사의한 사람들이었다. 수메르인들은 하나의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기원전 2800년 경에서 2500년 경에 이르기까지 메소포타미아의 하류, 오늘날의 페르시아 만 어귀에 수많은 독립적인 도시 국가들을 번성시켰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도시 국가는 우르(Ur)와 라가시(Lagash)였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 국가들은 아카드의 사르곤에 의해, 그리고 이후 다시 아모리인 구바빌로니아(Old-Babylonia)에 정복됨으로써 수메르의 문화는 대부분 살아 이어졌지만 수메르인의 지배는 종말을 고했다. 구바빌로니아 제국은 유명한 함부라비 왕 시대의 절정기를 지나 200여 년 동안 지속되다가 멸망의 길을 걷게 되고 이제 메소포타미아의 구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카시트인(Kassites)의 야만적인 지배가 600년이나 지속되었지만, 결국 새 주인은 아시리아인(Assirians)에게 돌아가게 된다. 일찍이 기원전 3000년 경부터 또 다른 셈족인 아시리아인이 티그리스 강 상류에 위치한 아수르(Assur) 고원에 작은 왕국을 건설하여 옛 문화를 부분적으로나마 수용․계승하지 않았더라면 수메르 문명은 아마 완전히 소멸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들 아시리아인들의 패권 장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발달의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이후, 아시리아를 멸망시킨 ‘느부갓네살’의 신바빌로니아까지 함께 포함시킨다면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가 상대적인 부침이 있었지만 흥하고 망하면서, 그리고 서로 전쟁하면서 공존하던 두 제국은 결과적으로 기원전 1900년 경에 시작해서 약 1500년간 지속된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는 존속하는 동안 내내 경쟁 관계에 있었지만 그 둘 사이의 문화적 차이란 사실 거의 찾기 어렵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박물관, 특히 영국의 대영박물관에는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온갖 종류의 성문, 날개 달린 소, 부도 작품, 마차, 생활용품 등 유물들이 자랑스럽게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두 제국의 진정한 보물은 그들이 남긴 ‘기록’인 것이다.

우주 창조 신화와 서사시, 왕들의 역사, 사원의 기록, 사업에 관한 계약 기록, 천체 목록과 천문학적 예측을 다룬 기록, 수학 공식, 지명 일람, 문법과 단어 교과서, 신들의 이름과 계보도, 그리고 신들의 의무 등이 기록된 수천 장의 설형문자 기록이 두 제국의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두 제국을 종교적, 역사적, 문화적으로 묶어준 공통의 언어는 ‘아카드’어(Akadian)였다. 그러나 아시리아인들과 바빌로니아인들은 이 셈족 최초의 언어와 문자인 아카드어와 아카드 문자를 결코 그들 스스로 만들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이 남긴 많은 점토판에는 그것들이 보다 앞선 원전을 복사한 것이라는 주석이 붙어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누가 신석기 모양의 설형문자를 만들었고 그것의 정확한 문법과 풍성한 단어를 발전시킨 것일까? 그리고 ‘앞선 원전’을 쓴 그 사람들은 누구일까? 또 아시리아인들과 바빌로니아인들 똑같이 그것을 왜 ‘아카드’어라고 부른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증폭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후 한때 아시리아의 수도였던 니네베(Nineveh/성서 음은 ‘니르웨’)에 세워진 도서관 유적지에서 발견된 무려 25,000장의 점토판이 해독됨으로써 그 의문은 풀렸다. 아카드는 메소포타미아 남부 즉 수메르 지역 안의 가장 강력했던 도시 국가 중 하나였던 것이다. 점토판의 기록 중에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이라고 기록된 문구가 이를 증명해준다.

수메르인들이 고안해낸 문명의 실체는 실로 다양하다.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에게서 발굴, 발견된 신전들이 놀랍기는 하지만 사실 그것은 인간에게 알려진 이 최초의 거대 문명이 이루어낸 물질적․정신적 성취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문자를 창안하고 발전시킨 것 외에도 여러 가지 활자를 만들어 인쇄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통형 인장도 발명했다. 또 60진법의 수 체계를 활용한 수학의 발전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이러한 과학적 발명은 건축과 의학, 야금, 심지어 베 짜는 섬유 기술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 걸쳐 응용되었다.

북이스라엘을 강점하고 호령한 아시리라인, 그 아시리아와 마지막 남은 이스라엘의 남유다까지 함께 패망시키며 유대 민족의 디아스포라(Diaspora)를 만든 바빌로니아도 새로 등장한 페르시아 제국의 먹이가 되고 만다. 기원전 539년의 일이다.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은 물론, 멀리 메디아(Media) 제국(지금의 이란 전 지역)과 아나톨리아의 여러 왕국들, 그리고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지배자 바사(Persia)의 고레스(Cyrus) 왕이 올라선 것이다.

그러나 페루시아 제국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BC 356-323)에 패망함으로써 수메르 문명은 지중해 연안의 크레타, 에게, 미케네 문명과 접합되면서 그리스 문명을 한층 더 고도한 문명으로 꽃피우게 된다.

그러나 최소한 기원전 3000년 전의 이집트와 크레타 문명의 시원은 아직도 수메르의 그 ‘최초의 것들’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다. 따라서 수메르의 불가사의한 문명 창조의 유물이 허구가 아닌 역사적 사실이라는 최종 판정은 아직도 유보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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