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가 영국제국주의의 통치를 받고 있을 때인 1921년의 일이었다. 현재 파키스탄 영토에 속해 있는 라호르와 물탄을 잇는 철로공사가 한창이었던 어느 날 일군의 인도 노동자들은 철로의 노반조성공사에 필요한 붉은 벽돌을 어디선가 연신 가져다 날랐다. 지급된 공사경비는 간데없고 인부들은 아직도 견고해 보이는 중고 벽돌을 몰래 가져오고 있었는데 급기야 공사 책임자 영국인에 의해 발각되었다. 오래된 벽돌 구조물의 존재를 급히 보고받은 고고학자 존 마셜을 단장으로 한 영국 고고학 발굴단이 도착함으로써 고대 인더스 문명은 이날을 위해 근 4천여년을 기다린 것 같이 20세기 초반에야 그 얼굴을 세상에 내밀었다. 이때는 약 320km에 이르는 노반공사에 고대 문명의 벽돌이 이미 사용된 후였다.

1921년부터 약 10년 동안의 발굴과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 후 다시 진행된 발굴들을 통해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를 비롯한 약 50여 곳 이상의 유적지는 인더스 문명의 세계가 면적만 약 50만 평방 킬로미터 이상이라는 거대한 고대문명이었음이 밝혀졌다. 대부분의 유적지는 인더스 대평원의 동부에 위치해 있는데 이 대평원이 지금은 타르 사막까지 이어지는 대 사막지대지만 당시에는 인더스 강과 다른 인도 고대 강들 그리고 그 지류들로부터 물을 공급받았던 비옥한 지대였다. 대표적인 도시인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는 인더스 강을 끼고 약 640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이 도시 외에 다른 도시들을 포함하여 이 지역에 융성했던 도시문명을 ‘인더스 강 유역의 문화’라 일반적으로 부른다.

인더스 문명의 시작을 기원전 4,000-2,500년으로 그리고 그 몰락을 기원전 1,500-1,900년으로 학자에 따라서 주장하는 견해가 다르지만 대략 기원전 3,000년경에서부터 기원전 1,500년경까지 번창했던 고대 인도 문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문명은 기본적으로 청동기 시대의 도시문명인데 이러한 흔적은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의 유적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두 도시 전체는 놀랄 만큼 기하학적 격자형으로 배열되어 있어 마치 현대의 계획도시와 같은 인상을 준다. 이 두 도시를 포함한 발굴된 대부분 도시들은 욕실과 우물이 있으며 하수구가 설치되어 있어 고대 도시문명 가운데 도시 전체가 높은 수준의 위행시설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헨조다로에는 길이 약 120 미터, 너비 70 미터, 깊이 2.5 미터의 대형 욕장과 8개의 작은 욕실들이 있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신성한 신상에 가까이 가기 위한 정화 목적의 목욕의식을 중요하게 생각한 흔적이라 생각된다. 이들 도시들에는 곡물 등 자재를 저장해 놓은 듯한 커다란 창고의 흔적이 있는데, 이는 인더스 강을 교통수단으로 하여 도시 간에 활발한 교역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지역들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토대로 볼 때 당시 인더스의 도시인들은 내륙에서는 바퀴달린 수레, 낙타, 나룻배 같은 이동 수단을 이용하여 물자를 운반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들 유적지에서 발견된 저울추들은 상당한 정확도를 보이는데 이들의 도량법은 주로 십진법을 기초로 하고 있어 당시 인도인들의 수학 수준이 상당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집트문명의 파라오나 피라미드처럼 대형 유물들이 인더스 문명에서는 발견되지 않지만  정교한 조각술을 보여주는 예술품들과 수천 개에 달하는 각종 인장(印章) 또는 문장(紋章)들이 출토되었다. 이들 출토된 유물을 토대로 하여 인더스 문명인들의 종교생활의 이해를 위한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유적지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테라코타로 만든 많은 나체의 여자 소상(小像), 성기가 크게 강조되어 있는 육감적인 토르소 남성 소상 등은 농업생산과 연관된 생산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개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의 인장과 연한 돌조각 그리고 몇 개의 구리판에는 다양한 동물, 인간, 문자, 기호 등이 새겨져 있다. 아직 문자나 기호에 대한 해독이 거의 되고 있지 못하지만 수메르나 파라오 통치 시기의 이집트의 필기체와는 확연히 구분된 놀라울 정도의 완숙한 문자체계가 인더스 문명에 존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발굴된 어떤 직사각형의 인장에는 머리를 아래로 하고 두 다리를 거꾸로 들어 벌리고 있는 발가벗은 여인의 모습이 있다. 그 여성의 양 다리 사이의 음부에서는 종류를 구분할 수 없는 식물이 자라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땅에서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그런 신성한 기운을 바라는 일종의 지모신(地母神) 숭배의식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이 생각하는 생산은 땅에 씨앗을 뿌리고 곡식을 거두듯이 여성이 아이를 낳는 생산의 터전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대지가 어머니의 신으로 형상화되었던 것이다. 인더스 강 유역의 거주자들은 이처럼 다산과 풍요의 신으로 여신을 숭배했는데 이러한 모신숭배는 지금까지 힌두교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인도 종교생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인더스 지역에서 발굴된 출토물은 고대 인도문명이 현재의 인도 문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흔적들을 말해주고 있다. 예컨대 요가 자세로 앉아 있는 신을 새겨 넣은 인장 여섯 개가 출토되었는데 그 인장 내용이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가 뿔이 세 개 달린 머리 장식을 쓰고 있으며 성기가 밖으로 드러나 있는 모습으로 보아 후대 힌두교의 대표적인 신인 쉬바 신과 깊은 연관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 인더스 문명 사람들도 후대의 리그 베다시대처럼 전문적인 사제는 아니더라도 대체로 사제들의 통치를 받고 있었던 것 같다. 후대 힌두의 카스트제도처럼 엄격하진 않았지만 도시가 일반 평민들의 거주지로 보이는 작은 집들과 성채에 딸린 대형 목욕탕 및 사원식 대형 구조물들로 구분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사제, 전사 계급, 일반 평민들과 같은 위계질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우리의 주요 궁금증은 대규모 도시생활을 하였던 인더스 유역의 주인공이 누구이며, 이 광대한 지역의 문명이 기원전 약 1500년을 전후하여 어떻게 철저하게 사라졌는가에 있다. 인더스 문명의 당사자는 드라비다 원주민이든 다른 계통의 토착민이든 간에 후일에 이 지역에 들어온 아리야인은 아니었다고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아리야인 인도 기원설’을 주장하는 인도의 고고학자 랄(Lal)과 종교 역사학자 게오르그 포이어스타인 등이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 역시 아리야인이었으며 그들은 인도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상당수의 학자들이 인더스 문화와 이어지는 아리야인에 의한 베다시대의 문화간에는  양립할 수 없는 몇 가지 증거를 토대로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은 아리야인이 오기 전의 인도 토착민이었음을 강조한다. 이들은 아리야인이 남긴 베다 경전에는 그들이 말을 주요 이동수단으로 널리 사용하였다는 수많은 기록이 나오지만 인더스 문명의 발굴에서는 말의 흔적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음을 그 근거로 생각한다. 게다가 인더스 문명은 농경을 중심으로 한 정착 도시사회인 반면 후속하는 아리야인의 리그 베다시대는 농경이 아닌 유목을 중심으로 하는 이동사회였음도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이 아리야인이 아니었음을 주장하는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인더스 문명의 몰락의 주요 원인으로 그간 ‘아리야인 침략설’을 제외하면 홍수로 인한 파괴나 사막의 확장을 비롯한 기후와 생태 환경의 변화 혹은 인구의 폭발과 그로 인한 식량문제의 대두 등이 주로 거론되어 왔다. 일부 고대 문명이 지진과 화산폭발 등 지질학적 변화로 인한 지구의 재앙으로 사라진 사례들과 과학문명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지진과 쓰나미, 하리케인 등에 의한 대참사를 생각한다면 약 4,000년 전에 고대 인도에서도 이와 유사한 자연재앙의 발생이 인더스 문명을 순식간에 몰락하게 만든 결정적 이유가 되었음 직 하다.

아리야인 침략으로 인한 인더스 문명의 몰락설은 이제 거의 부인되고 있다. 사실 아리야인은 특정 인종적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닌 인도-유럽어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기 때문에 이들이 인종적으로 동일 집단에 속한 것은 아니다. 약 기원전 2,000년경에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의 초원지대로부터 인도-유럽어족의 확산이 시작되어 서쪽으로는 영국, 아일랜드, 독일, 그리이스, 이탈리아, 동쪽으로는 이란에 이르렀다. 이곳으로부터 인도-이란어족의 한 갈래인 인도-아리야인이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 펀자브 지방에 도착하였는데 그 시기가 대략 기원전 1,500년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들 아리야인이 인도에 도착할 무렵은 이미 인더스 문명이 자연재앙으로 파괴되어 무너져 가는 상태였기 때문에 토착민의 아리야인에 대한 거센 저항은 없었다고 보고 있다. 유목민인 아리야인은 목축을 중심으로 하여 말과 마차를 이용해 이동생활을 하면서 청동제 무기로 토착민들을 어렵지 않게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리야인이 인도 대륙을 정복한 시대는 ‘베다’가 만들어진 시대와 거의 일치하는데 이 때문에 이 시기를 베다시대라 부른다. ‘리그 베다’가 아리야인의 일상생활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주진 못하지만 그들이 숭배한 주요한 신들 예컨대 폭풍우의 신 인드라, 불의 신 아그니, 물의 신 바루나 등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사실 리그 베다는 자연현상을 인격화한 신들에게 희생제를 올릴 때 부르는 찬가와 제례용 주문인 만트라가 담긴 노래 모음집이다. 리그 베다시대로 보는 기원전 1,500년에서 약 기원전 1,000년 기간에 소는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지만 토지에 관한 사유재산의 개념은 아직 발달하지 않았다. 그 시기에는 부족장 중심의 부족회의는 존재했지만 아직 국가의 개념이 발생하지 못하였으며 전사, 사제, 평민들의 계급적 구분은 있었다고 본다.

대략 기원전 1,000년부터 기원전 600년 경 사이에 아리야인들은 동쪽으로 갠지스 강과 야무나 강 사이의 대 평원으로 이동하여 정착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들의 정착생활은 기원전 1,000년경부터 보급된 철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철의 보급으로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는 농업이 주산업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시대 말기 무렵에 브라만, 크샤트리야, 바이샤, 슈드라의 네 계급의 분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데, 이 가운데 희생제를 주관하는 브라만이 최고의 지위를 누렸다. 이제는 리그 베다 시대의 자연현상을 인격화한 신들이 퇴조하고 브라흐마, 쉬바, 비슈누의 삼신체계가 확립되면서 이들에 대한 희생제사로 인한 막대한 소의 손실이 발생하였다. 농경에서의 소의 중요성과 의례에 치우친 브라만 중심주의 사회에 대한 크샤트리야 출신 붓다와 마하비라가 약 6세기 무렵 불교와 자이나교를 만든 것은 일종의 종교사회개혁 운동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인더스 강 유역에 시작된 인도의 고대문명은 그 몰락과 함께 아리야인의 인도 진출, 브라만 중심주의 베다사회, 이를 개혁하고자 한 불교와 자이나교의 탄생으로 그 역사적 흐름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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